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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8> 천상의 꽃길 걸어 쌍계로

“화개차 한 모금에 청정 기운 북돋우니 동국 기품 보듯하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22 19:48:16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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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수·음수가 각각 샘솟는 ‘옥천’
- 마치 눈 속에 활짝 핀 꽃 같으니
- 삼법화상, 그곳에 ‘옥천사’ 세워
- 불법 깨친 진감선사 뒤이어 중창

- 입구부터 온통 복사꽃·벚꽃세상
- 치원, 천상 온 듯 황홀경에 빠져
- 왕명에 따라 사찰 비문 짓기 전
- 전통차 한 잔 마시며 정신 정화

천상으로 가는 길인가. 하동에서 화개로 향하는 길은 온통 복사꽃으로 뒤덮인 동굴이다. 살짝 바람이라도 스치면 난분분하는 꽃잎은 천지를 연분홍빛 세상으로 물들이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경이다. 이 길을 따라 끝에 닿으면 그대로 무릉도원의 문이 열려있을 것 같더니 옥천사(玉泉寺) 가는 오른쪽으로 꺾어 들자 이번에는 벚꽃 동굴이다. ‘옥천’이라 하면 분명 구슬 같은 물에서 비롯되었을지니, 과연 길을 따라 흐르는 개천의 물은 투명하다 못해 눈이 아릴 지경이다.
   
신라 성덕왕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화상이 창건한 하동 쌍계사는 이후 당에서 깨우침을 받은 진감선사가 귀국 후 중창했다. 최치원은 헌강왕의 명을 받아 888년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비문을 짓고 글씨도 직접 썼다. 원래 이름은 옥천사였지만 헌강왕의 뒤를 이은 정강왕이 계곡의 시냇물이 합쳐지는 것을 보고 쌍계사로 이름을 바꿨다. 하동군 제공
“여기가 옥천사로 드는 입구입니다.” 길 안내를 하는 군사가 다시 오른쪽 길을 가리킨다. 좁아 드는 길 양편에 장정 키를 넘는 높이와 폭의 바위 두 개가 수문장인양 버티고 서있다. 왼쪽 것은 땅에 박힌 바위를 반석으로 올려져 있고 오른쪽 바위는 땅에 박힌 그대로이니 인공으로 옮겨놓기란 가능치 않을 듯하다. 이 모습 그대로 일주문을 대신해 속계(俗界)와 법계(法界)를 가르는 돌문(石門) 역할을 하니 아마도 천상의 뜻이리라.

■삼법화상, 옥천사를 세우다

   
쌍계사 금당 석탑. 중국 불교 선종 6대조 혜능대사의 머리뼈를 모신 곳이다.
옥천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3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화상이 창건했다. 삼법은 평소 선종의 6대조 혜능대사의 가르침을 받기를 소원했으나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혜능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에서 ‘내가 입적한 뒤 한 사람이 나의 머리를 가지러 올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당으로 건너가 그 정상(頂相·머리뼈)을 구해 모셔왔다. 어느 날 꿈에 혜능이 나타나 ‘지리산 아래 산수가 연꽃 같은 곳의 눈 속에서 꽃을 찾아 나를 봉안하고 절을 지으라’ 계시하였다. 때가 12월 한겨울임에도 삼법은 당장 지리산을 찾았으나 눈이 쌓여 길을 잃었다. 문득 사슴이 나타나 안내하듯 앞서가니 뒤를 따랐다. 석문이 나타나고, 얼마쯤 더 올라가자 추위에도 얼지 않고 물이 솟는 샘이 있었으니 눈 속에 핀 꽃 같았다.

삼법은 그곳에 정상을 봉안하고 탑을 세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또 혜능이 꿈에 찾아와 ‘탑을 세워 현창(顯彰)하지 말라. 비문을 만들어 기록하거나 새기지 말라. 무명 무상이 제일이니라’ 했다. 이에 삼법은 돌로 함을 만들어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어 ‘옥천사’라 했다. 뒷날 혜능의 정상은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에 봉안되어 쌍계사 금당(金堂)에 모셔져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강함은 덮고 부드러움은 어우러짐이니 화개차가 그러하다

   
쌍계사 팔상전 인근에 위치한 두 개의 샘인 옥천(옥천). 양수와 음수로 각각 솟는다.
옥천사의 내력을 들려준 스님은 빈 찻잔에 또 찻물을 채운다. 이야기에 빠져있던 치원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가다 문득 멈춘다. 차라면 당에서 내도록 마셨고 여러 차를 섭렵했다. 그런데 그윽하면서도 향기로운 가운데 산뜻하게 번지는 청량한 기운이 새로웠다. 잠시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니 과연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님이 빙그레 웃음을 머금는다. “차 맛이 괜찮으십니까?”

“특별합니다. 당에서 여러 차를 마셨고 측천무후가 즐겼다는 신양모첨(信陽毛尖)이나 황실에 진상하는 동정 벽라춘(碧螺春)도 맛보았지만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향의 청아함과 청정한 기운은 마치 우리 동국의 기품인 듯 오히려 빼어납니다.”

그저 하는 상찬이 아니다. 신양모첨은 차운·집운·연운·운무·천운 등 ‘구름 운(雲)’ 자가 들어간 다섯 산에 둘러싸인 오늘날 하남성 신양(信陽)이 산지였다. 구름과 안개가 많아 차 재배에 적합하니 향도 특별한 데다 그 녹차로 측천무후가 병을 고쳤다 하여 총애한 황실 차였다. 동정호에 둘러싸인 동정산에서 생산되는 벽라춘 역시 그 빼어난 향으로 ‘혁살인향(吓煞人香·사람이 놀라 죽게 할 향)’이라는 별칭을 얻은 황실 차였다.

“당의 차는 향이 특별하더군요.”

“예, 차 자체의 향도 강하지만 물맛 때문인지 진하게 우려 마시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우리 차를 마시면서 그윽한 향이 오히려 마음을 더 안정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함은 덮는 것이고 부드러움은 한데 어우러지는 것인데 화개차는 산뜻하고 청정한 기운까지 도드라지니 정신을 정화하는 데 더 없는 듯합니다.”

“아직 햇차가 나지 않아 지난해 차인데도 그러하시다면 아마 옥천의 물 덕분일 겁니다. 이제 곧 새싹을 따 제다한 우전이 나올 테니 비명을 찬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옥천’은 지금의 쌍계사 팔상전 오른쪽에 있는 샘으로 두 개의 샘이 나란히 붙어있다. 양수(陽水)와 음수(陰水)가 각각 솟는 보기 드문 예이다. 양수는 맑고 밝은 느낌이고, 음수는 물 위에 햇빛이 들면 흰빛이 감돌아 서기가 어린 듯한데 물을 길어 올리면 맑은 빛을 띤다. ‘옥’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물맛이 청량하고 달아 오랫동안 승들의 찻물로 애용되었다. ‘옥천사’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진감선사, 삼법 이어 옥천사 중창

   
진감선사는 어머니께서 한 스님이 아들이 되기를 원한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태어날 때 울지 않아 소리가 작고 말이 없는 거룩한 싹(선사의 조짐)을 타고 났다. 유년시절부터 집안이 가난하였음에도 천시와 지리를 이용하여 부모를 봉양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가 무덤을 이루고 ‘길러주신 은혜에 힘써 보답하였지만 심오한 진리를 어찌 힘써 구하지 않겠는가’ 하고 출가했다.

애장왕 5년(804년) 당으로 가는 세공사의 뱃사공을 자원하여 바다를 건넌 뒤 선종 4조 신감대사를 찾아가니 절도 마치기 전에 ‘슬프게 이별한 지 오래인데 다시 기쁘게 만나는구나!’ 전생의 연을 말하며 반겼다. 진감선사는 얼굴빛이 검어 흑두타(黑頭陀)라 불렸는데 이는 동진(東晋) 시기의 고승 도안법사의 별명이기도 했다.

헌덕왕 2년(810년) 허난성 숭산(崇山) 소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서남쪽을 두루 돌며 세상의 모든 법과 이치를 깨우쳤다. 이후 종남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로 연명하며 망상을 억제하고 우주만물의 진리를 깨닫기를 3년, 다시 3년을 세상에 나아가 고단하고 힘든 자들을 보살피고 다독였다.

마침내 흥덕왕 5년(830년) 귀국하니 왕께서 칙서를 내렸으나 상주 노악산에 머물렀다. 명의를 찾는 병자처럼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니 몸을 일으켜 지리산에 이르렀다. 몇 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길을 인도하였는데 따르는 사람들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화개곡에 이르러 예전 삼법화상이 세운 절터에 불사를 일으키니 조화로 이루어진 것 같았고, 옛 옥천사를 이음이었다.

■19번 국도, 원래는 복사꽃길

오늘날 하동에서 화개에 이르는 길(19번 국도)은 복사꽃길이 아니라 벚꽃길이다. 일제가 강토를 점령한 뒤 벚꽃을 자기네 나라꽃이라 여겨 1931년 신작로를 닦으며 길 양편에 복숭아나무를 뽑고 벚나무를 심었기 때분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은 것은 알고 보니 일본 벚나무가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이 원산인 왕벚나무였으니 우리나라 꽃이었다. 어리석어라, 일본이여! 장하고 아름답구나, 우리 왕벚나무여!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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