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훤 언제 산넘어 몰려올지 몰라
- 나라의 안위 점점 위태해지고
- 해인사 희랑화상 강론 초청에도
- 갈 수가 없어 외로운 마음 커져
- 치원 생기 없고 쓸쓸한 기색에
- 아내 ‘솔송주’로 주안상 차려
- 어머니께서 정성스레 담근 술
- 지리산 솔잎·송순으로 빚어내
- 나라의 내일, 인재 양성에 달려
- 그 길 준비토록 마음먹은 치원
- ‘든든한 벗’ 아내와 술잔 나누니
- 존중·애틋한 마음 절로 깊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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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 손부 박흥선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27호·경남 무형문화재 35호 기능보유자)이 옛날식 증류기인 소줏고리에서 갓 증류한 술을 내리고 있다. 함양은 신라시대에 군이 설치된 큰 고을이었으니 진작부터 빚어졌고 재현된 것이이라. 함양군 제공 |
■벗의 초청에 응하지 못한 고운
해인사 희랑화상(希郞和尙)이 화엄경을 강론한다며 초청해왔지만 갈 수가 없다. 견훤 무리의 기세가 점점 거세져 언제 서쪽 산을 넘어올지 모르는 형국이니, 겸직한 군정직인 ‘방로태감’으로서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지 않은가. 미안한 마음을 절구(絶句) 10수를 지어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그리움이 깊어진다. 희랑은 머리를 깎은 승려지만 어찌 인연이 닿아 벗처럼 친근하다. 시세는 점점 위태해지고 외로움마저 깊어지니 흉금을 터놓을 벗이 더욱 그립다. 쓸쓸한 마음을 알았는지 안해가 주안상을 들여온다.
“봄에 담근 술이 잘 익어 향기가 은은합니다.” 치원은 안해에게도 앉기를 권한다. 소반에는 술 한 병과 석이버섯무침이 보인다. “송주라 했습니까?” “예, 송주라고도 하고 솔주라고도 한답니다.” “허허, 그럼 솔송주라 하면 되겠습니다.” 치원의 말에 안해는 미소를 머금는다. 섞기가 어려운 상극도 조금씩 덜어내 화합하려는 성품이니 단번에 ‘솔송주’라는 이름으로 융합한다. 그처럼 다툼을 삼가고 한데 어우러지는 세상을 바라는 이가 왕궁에서는 귀족의 차별에 갈등하고 외직에 나와서는 또 반란의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니 마음의 좌절이 클 것이다. 제방과 대관림 공사에서는 얼마나 생기 가득하고 환하셨던가. 지켜볼 뿐인 마음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술이 아니라 신선의 차향입니다.” 첫잔을 내려놓는 치원의 감탄에 안해가 답한다. “송순과 솔잎의 향입니다.” “그 푸름에 지리산 맑은 물이라. 과연 신선에 어울립니다. 이렇게 어우러지면 신선이 되는 것을….” 가야산에서 사람이 다녀간 뒤 쓸쓸한 기색이 역력해 아직 해가 남아있지만 주안상을 들였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취하실 듯싶다. “어머님 돌아오시면 저녁상 차릴 요량이었는데, 안주를 좀 준비하겠습니다.”
■신선의 차향이 이러하리, 솔송주
치원의 안해는 배추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무는 찜기에 쪄내 밀가루를 묻혀 돼지기름으로 지진다. 좋아하시는 석이버섯도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을 해 더 무쳐둔다. 갈무리해두었던 흑염소 육포, 꿀에 재워둔 도라지와 연근강정도 덜어 접시에 담는다. 송주, 아니 솔송주는 술을 즐기는 태수님을 위해 어머님이 천령 고을사람들에게 물어 배우셨다. 찹쌀로 죽을 쑤어 밑술을 만들어 발효시키고, 4월 중순쯤 지리산 소나무에서 딴 송순과 솔잎, 엿기름을 넣어 빚는다. 한 달쯤 상온에서 숙성시킨 뒤 서늘한 곳에 두어 달 더 익힌 후 한지로 걸러 차갑게 보관한다.
술을 빚는 방법이야 집집마다 같지만 정성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니 매사가 오직 재료에 달린 것만은 아닌 성싶다. 어머님은 술을 담그는 날 이른 새벽에 방을 나오셔서 몸을 정갈히 하고 가장 고운 옷차림을 갖추셨다. 관아에는 찬모(饌母)가 여럿 있지만 찹쌀 씻는 일부터 손수 하시기에 자신은 솥이며 항아리를 닦고 불을 지피는 따위의 뒷바라지를 정성껏 하였다. 결혼한 뒤부터 내내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머님과 태수께서 드실 음식은 모두 손수 장만하고 차려낸다. 맑은 마음에 고귀한 뜻을 품으시고 행함에 한 점 티끌도 없으시니 존경하는 마음이 갈수록 깊어져 저절로 정성을 다하게 된다. 태수께서도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뭇사람의 귀감이 되는 바이지만 안해인 자신에게도 존중과 아낌을 다해주신다. 무릇 부부의 깊음이란 그런 존경과 존중,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의 보살핌에서 이뤄지고, 그런 바탕이 가족과 가정을 안온하게 함이니 여자로서도 안해로서도 더없는 행복이었다.
상을 다 차려 나오는데 대관림 산책을 가셨던 어머님이 들어오신다. 치원의 처는 얼른 상을 내려놓고 맞으러 달려가는데 어머님의 낯빛이 창백하고 걸음은 허둥거리신다. “어머님, 무슨 일이세요!”
놀란 고음에 치원도 방문을 열고 황급히 달려 나온다. “어찌 안색이 이리 창백하십니까, 어머님!” 아들의 맨발에 어머니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오. 괜찮아요, 태수.” 치원은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안심시키며 옆에서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 못하는 여종을 돌아본다. “마님께서 숲가에 앉아 쉬시는데 갑자기 숲에서 큰 뱀이 나와 놀라셨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치원은 그저 놀란 것이라니 마음을 쓸어내리며 어머니의 어깨를 껴안는다. “그게 어찌 네 잘못이더냐. 너도 놀랐을 텐데. 그만 들어가 쉬어라.” 여종이 물러가자 치원은 어머니의 등을 도닥이며 약속한다. “어머님, 제가 내일 새벽에 관림 숲에서 주문을 외워 다시는 놀라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존경과 존중으로 깊은 부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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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송주 모음. |
치원은 어머니의 저녁상과 잠자리를 살펴드리고 온 안해와 주안상을 마주한다. 자주 있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의 쓸쓸함에 벗을 해줄 유일한 사람이기에 청했다. “내일은 차를 넉넉히 준비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견훤 무리의 기세에 아무래도 여기 천령도 곧 온전치 못할 것 같습니다. 나라가 위태하다 해도 언제든 혼란이 가라앉으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할 테니 뜻있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길을 열어 준비토록 하는 것이 제 일인 듯합니다. 과거제가 실행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지방의 관리 또한 백성을 대하고 다스리는 근본을 깨우치면 다시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일은 없겠지요.”
“짧게 끝날 자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요기 될 만한 것도 같이 준비하겠습니다.” “오늘도 수고를 끼칩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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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송주 같은 명주에는 석이버섯무침, 정과 등 과하지 않은 주안상이 제격이다. |
어머니가 정해주신 배필이다. 눈부신 빛으로 보다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은은함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말수는 적으나 뜻을 밝히고 전함에는 언제나 정연하고 의연하다. 오후에 어머님 일로 놀라 목청을 높였을 뿐 언제나 조용한 음성으로 기품을 지킨다. 귀를 닫은 듯하나 모르지 않으며 말은 없으나 앞서 준비한다. 아마도 자신이 길을 잃으면 서슴없이 말하리라. 든든한 안해이며 벗이고 동지이지만 치원은 그 두려움에 스스로를 경책한다. 모름지기 가정의 두 기둥은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로소 쓸쓸함이 달래진다
“오늘 밤은 안방에 들겠습니다.” 치원은 안해의 잔에 술을 따라 권한다.
언제부터 솔송주가 빚어졌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군(郡)이 되어 태수가 있었고 산이 깊고 물이 많으니 기록이 없을 뿐 술 또한 진작 빚어왔을 것이다. 남은 기록으로는 하동 정씨 문중에서 가양주로 지켜와 오늘의 ‘솔송주’에 이르렀다.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 다수가 방문해 향과 맛에 찬탄을 망설이지 않았다. 근래에는 국빈주로 외빈을 맞기도 했다. ‘신선의 차향으로 마음을 위로하고 기쁨의 설렘을 안겨주는 천년의 우리 술’. 변화를 따르느라 놓아버린 그때의 안주까지 찾아 한 상으로 내놓으면 지리산의 기품, 우리의 문화로 어엿하지 않겠는가.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취재 지원= ㈜은산해운항공, ㈜DK-LOK, ㈜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