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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3> ‘지리산’

韓 격동의 시공간 아우르는 상징… 소외된 이들 분노·슬픔의 기록

  • 정호웅 문학평론가·홍익대 교수
  •  |   입력 : 2022-09-25 19:17:42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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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 혼란의 시대 약자들의 이야기
- 골짜기 음지문학 일구고자 노력

- 일제에 끌려갔던 학병 출신자들
- 치욕과 환멸 작품 곳곳에 담아
- 스페인 시 삽입해 새롭게 해석
- 공산주의 삶 허망하단 인식 남겨

1985년, 이병주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대하소설 ‘지리산’이 간행되었다. 월간지 ‘세대’ 연재(1972.9-1978.8)가 끝난 지 7년 만이었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 표지석.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리산’은 작가 이병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격동의 역사 뜻하는 상징

시간 배경은 1933년의 추석날에서 1955년 8월 31일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박태영이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는 때까지이다. 일본의 만주 경영,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해방공간, 6·25전쟁, 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대였다. 소설 ‘지리산’의 인물들은 하나 예외 없이 크게 깊게 흔들리며 이 굴곡 심한 역사의 벼랑길을 위태롭게 걸어야 했다.

공간 배경의 중심은 물론 지리산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발길은 지리산을 에워싸고 사방으로 뻗은 덕유산과 괘관산 등의 산, 서울 도쿄 등 국내 국외 도시, 일본군이 진출했던 중국과 버마 등의 전선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 ‘지리산’은 1915m의 높이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경계에 우뚝 솟은 그 지리산이면서, 또한 그 주변 높고 낮은 산들이며, 동시에 국내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당대 한국인의 발길이 가 닿은 멀리 아시아 여러 곳까지 아우르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에 멈추지 않는다. 이 대하소설을 종횡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이 이 격동의 시대와 공간을 엮어 짜니 소설 ‘지리산’의 이 같은 시공간 배경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한몸이 된다. 이 점에서 ‘지리산’은 일제강점기에서 6·25전쟁 직후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를 뜻하는 상징이다.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시공간적 상징으로서 거세게 일렁이며 흐르는 역사 그 자체이다.

■골짜기의 문학

이병주는 자신의 문학을 두고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작가의 눈길 붓길이, 작아서 숨어 있어서 공적 역사의 기록자인 사관의 눈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향한다는 사실을 압축한 말이다. 그 작고 숨은 것들은 대체로 약자와 패배자 등 주변부에 소외된 이들의 사연과 그것에 담긴 그들의 분노 고통 슬픔일 터이다. 이병주는 강자와 승리자의 기록인 양지의 역사가 배제하거나 간과한 약자와 패배자의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찾아 증언하는 골짜기의 문학 음지의 문학을 일구고자 하였다.

이병주의 많은 소설 가운데 실재했던 골짜기의 사연을 증언하는 기록으로서의 문학이란 이름에 가장 걸맞은 작품은 ‘지리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실록 대하소설’이라 하여 ‘실록’을 강조한다. ‘지리산’의 주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가 증언을 위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점도 이것과 관련돼 있다. 역사의 기록자이며 증언자라는 자의식을 지닌 지식인 이태(실존 인물, 본명은 이우태)가 생사를 건 도피행 가운데서도 자료를 모으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마찬가지로 지식인 빨치산인 박태영이 그를 이어 전기(戰記) 편찬자가 되는 것, 박태영이 친구 이규에게 자신의 삶을 기록하여 뒷날 증언해 줄 것을 당부하고 이규가 이에 동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증언을 위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구성요소가 이 길고 복잡한 작품을 하나로 꿰어 엮는다.

■꽃밭의 사상

지리산 중산리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조형물. 아픈 역사를 딛고 화합하자는 메시지가 읽힌다.
1944년 1월 20일,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식민지 한국의 청년 4385명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본군에 입대하였다. 이른바 학병이다. 형식은 지원이었지만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 동원 곧 징병이었다. 대구의 일본군 부대에서 훈련을 마친 이병주는 중국 소주에 배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말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무력하게 끌려가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는 이 치욕을 이병주는 평생 앓았다. 많은 소설과 수필에서 거듭 이를 다룬 것은 그 내상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병주는 자신을 포함한 이들 한국인 학병을 고용된 병사 곧 용병이라 불렀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몸을 판 인간 말종이라는 자기부정의 환멸감과 함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놓였던 자신들을 가여워하는 마음도 들어 있고, 몸을 팔긴 했지만 정신을 팔지는 않았다는 묘한 자기위안의 뜻도 들어 있는 말이다. 이처럼 단순하지 않지만, 자기부정의 환멸감이 핵심임은 물론이다.

‘지리산’ 곳곳에도 학병 출신자의 이 같은 자기부정의 환멸을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 나온다. 예컨대 이런 이야기.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 한 학병 출신자는 변소에 들어가 울며 “과연 내게, 우리에게 이 해방에 감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려는 노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예 상태를 감수하며 상전들에게 아첨해온 노예라면, 외고 펴고 그 기쁨을 나타낼 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해방의 기쁨을 마음 편하게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한갓 노예였다는 학병 출신자의 자의식이 목숨 걸고 학병 지원을 거부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 움직임을 낳는 것은 자연스럽다. 학병 출신자인 작가의 그런 마음 움직임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조국 독립과 민족 독립을 꿈꾸며 일본의 속박과 압제에 항거한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도록 이끌었다. 작품에서는 그런 그들의 사상을 ‘화원의 사상’이라 이름 지어 예찬하였다. 일본의 노예 되기를 거부하고 항거의 험로를 자진하여 걷는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고귀한 뜻과 삶의 꽃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리산’은 함경북도 갑산의 험준한 산속에 숨어 학병 동원을 거부한 인물의 영웅적인 고투를 그린 이병주의 장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와 같은 자리에 놓여 빛난다.

■허망의 정열

이병주 소설에는 삽입 시가 자주 나오는데 ‘지리산’에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도 있다.



어디에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카탈루냐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별들만 노래하고 지상에선 모든 음향이 일제히 정지했을 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유언이 없느냐고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을 심지 말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가 이끈 파시즘 세력에 맞서 싸우다 학살당한 스페인의 시인인데 이 삽입시는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쓴 작품이라 한다. 열린 작품이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터인데, 자신의 뜻과 삶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정신이 죽음의 순간을 상상적으로 미리 체험하며 느끼는 황홀경을 표현한 시라는 해석이 가장 상식적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시인의 두 발은 반파시즘 투쟁 거점인 카탈루냐의 대지를 굳건히 딛고 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죽음으로써 별들만이 노래하는 하늘로 아름답게 떠오르니 그는 무덤 앞 꽃나무도 필요 없는 완미한 존재로 완성됐다.

그런데 ‘지리산’에서는 반대로 해석하여 ‘허망의 정열’이라는 소설의 또 다른 주제와 관련지었다. 유토피아 건설의 꿈을 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로르카에게서 혁명적 정치의식으로 무장하고 과거 파괴와 미래 건설을 꿈꾸며 나아가 ‘죽고, 죽어가고 있고, 계속 죽어야 하는’ 이 땅의 뛰어난 인재들의 비극을 읽고 깊이 한탄하는 작가의 마음이 ‘허망의 정열’이라는 시적 표현을 낳았다. 지리산에 깃들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삶이 허망한 것이었다는 작가의 이런 역사인식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논쟁적 토론 대상이 되어 우리를 역사적 대화 마당으로 이끌 것임에 틀림없으니 ‘지리산’은 먼 미래에 속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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