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63주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아 원로 국사학자인 이만열 연세대 석좌교수와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9일 본지 김경곤 서울정경부장이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이 교수의 자택을 찾아 광복의 의미와 '건국절' 논란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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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오른쪽) 연세대 석좌교수가 지난 9일 자택에서 김경곤 본지 서울정경부장과 정부수립 60주년 특별대담을 갖고 있다. 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김경곤 부장=일부 시민단체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 등 13명이 이 같은 내용의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정부는 국무총리 산하에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평화통일시민연대 등 55개 시민사회단체는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사업위와 그 주요 사업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서와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습니다. 8·15를 앞두고 '건국 논란'이 뜨거지고 있는데, '정부수립 60주년' '건국 60년' 등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만열 교수=건국이란 나라를 처음 세웠다는 의미입니다. 건국 60년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1948년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단기는 어떻게 되고, 개천절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1948년 정부수립 때 '민국 30년'이라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 해 5월 31일 제헌국회가 소집됐을 때 "이 국회는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다. 나라도 그 때의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뿌리를 29년 전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행정수반이 됐을 때 처음 나온 관보에서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중앙청에 내걸린 펼침막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했습니다. 건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1948년을 건국 원년으로 한다면 우리 스스로 나라를 세운 게 되지 않습니다. 외세가 해방을 시켜주고 그 덕분에 나라를 세운 것이 되니까요. 1919년 일제 때 독립 선언을 하고 임시정부 세우지 않았습니까. 자주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굳이 지금에 와서 건국 60주년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 때 정부를 계승한다면서 건국 60주년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김=미국은 1776년 7월4일 독립을 선포하고 1783년에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1788년에 제헌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1789년에 대통령을 선출, 연방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1776년 7월4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고, 200년 이상 그렇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60년 전부터 '민국 30년'이라고 해왔는데, 굳이 이 시점에서 '건국 60주년'이라는 표현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건국 60주년을 주장하는 사람의 인식이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나라는 영토, 국민, 주권행사를 다해야 하는데 임시정부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헌법대로 우리가 다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지금 정식국가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건 자가당착입니다.
건국 60주년이라고 하면 그 이전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데 강제 점령이기 때문에 주권행사 못했습니다. 건국 60주년론자들은 강제 점령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건국 60주년을 하는 배경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역사관은 일제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정권이 바뀌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과 연결된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건국 6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기념사업을 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정부수립 60주년이라고 하면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경부선 철도를 건설한 것은 일본이라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본주의를 할 수 없었는데 일본이 한국에 정착 발전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나 '한국 자본주의 맹아론'을 전면 부정하는 처사 아닙니까.
▶이=국사학계에서는 일제식민지 시기를 수탈론의 입장에서 봅니다. 일부에서 일제가 한국 자본주의를 심어줬다고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전에 우리는 실학시대 이후에 자본주의 싹을 갖고 있었습니다. 농업분야에서는 대형 농업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벼농사에서 이앙법이 도입되면서 노동력이 크게 절감됩니다. 상업적 농업이 본격화됐으며 화폐발행도 굉장히 늘어납니다. 장시(場市)가 늘어나고 대자본가가 출현합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중요한 것은 신분제의 붕괴인데, 숙종 이후 철종까지 120년 간 급격한 신분제 붕괴가 나타납니다. 이때를 근대화로 넘어가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러한 자생적 근대화론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민간단체면 모르겠으나 정부가 건국 60주년 행사를 하겠다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됩니다.
▶김=건국 60주년논쟁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건국 60주년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리해주십시오
▶이=정부수립 60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거행해야 합니다. 건국 60주년 문제는 정부가 제의해주면 좋고 아니면 학계에서 치열하게 토론해야 합니다. 초대 정부도 '민국 30년'이라고 했으니까 이를 바꾸려면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지난 60년 대한민국의 역사는 숱한 굴곡 속에서도 질적 양적 팽창을 거듭했습니다. 총체적인 점수를 매긴다면 어떤 평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많은 사람들이 지난 60년 간의 대한민국에 대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해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평가에 인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간 공들인 우리의 경륜과 피땀이 좀 더 민주적이고 유능한 지도자와 통합적인 사회여건으로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면 훨씬 알찬 발전을 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지난 60여년 간 중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자유당 독재와 4·19혁명, 군사정권과 10·26, 신군부 정권과 6월 혁명을 거듭하면서 민주주의는 놀랄 민큼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민도가 높아졌지만 대의정치의 한계는 오늘날 촛불민주주의 단계로까지 진전됐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경제는 해방 당시 36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로 올라섰고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또한 지난 60여년이 남긴 놀라운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와 양극화로 인해 발생하는 극심한 부작용은 이에 못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타문화의 이입수용과 자문화의 비판적 창조적인 계승 발전의 두 측면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창조적인 역량과 교육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나는 우리 나라가 독립자주의 나라, 통일평화의 나라, 자유민주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외교 군사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군사 외교적 역량을 자주성 강화로 연결시키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통일평화의 역량은 남북간 힘의 균형이 바뀌었을 뿐 남북 양정부의 실천의지는 큰 진전이 없었습니다. 지난 60년 간 대한민국의 성장 발전의 요체는 바로 자유민주의 신장에 기초했다고 강조하고 싶네요.
▶김=지난 60년의 역사를 통해 영광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난제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점은 무엇이며 반대로 바꿔나가야 할 점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이런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는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는 백범 김구 선생의 염원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통일평화, 자유민주를 실현하는 바탕 위에서 정직하고 신뢰받는 나라, 용서와 화해에 앞장서서 평화의 사도가 되는 한국, 세계를 향해 나누고 섬기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욱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신뢰받는 나라가 되는 것은 우리의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고 선진사회를 이룩하는 첩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맞춰 교육의 제1목표도 정직 정의에 두고, 나라의 시스템도 거짓이 발붙일 수 없도록 조율해야 합니다. 정직은 정의의 기초로서 사회적 신뢰를 담보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 한국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인 남북, 지역, 경제, 이념 간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를 실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었던 식민지 경험은 평화한국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를 향해 나누고 섬기는 나라가 된다는 것은 도움을 받기보다는 나눠주는 나라, 섬김을 받는 한국인이 되기보다는 세계를 내 품속에 넣고 섬기는 한국인이 되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계 어느 곳이나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강대국에 의한 침략의 역사는 이제 공생과 나눔의 역사로 바꿔가야 합니다. 그걸 우리가 하자는 것이지요.
# 이만열 교수
1938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마산고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2003년까지 숙명여대 교수로 재임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제 4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이 교수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연세대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교수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분과위원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회 위원장, 도산학회 회장 등을 맡아 왕성한 연구 활동과 함께 탁월한 학술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12일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2007년도 푸른역사 간행)으로 2008년 제4회 독립기념관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저작은 7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매 장마다 꼼꼼히 사료를 제시하며 실증에 의거하여 한국 근현대 역사학을 정리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