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장에서 경남도지사까지 오른 김두관 전 지사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김 전 지사는 8일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12월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김 전 지사는 `성공신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빈농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1977년 남해종합고등학교(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2년 뒤 경북전문대학(전 영주경상전문대학)에 입학했고,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1987년 졸업했다.
25세 때인 1986년 그는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하다가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김 전 지사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행정과 주민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이 되겠다"며 마을 이장 선거에 나가 당선된 것이 나이 30세 때였다.
이장으로서 그는 20여명의 어촌계가 독점하고 있던 마을 공동어장의 수익을 150가구에 배분하는 `실적'을 남겼다.
그는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군수직에 도전했다.
전국 최연소인 36세로 경남 남해군수에 당선되면서 정계를 향한 문이 열렸다.
여당의 텃밭인 경남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는 점을 지역 정가는 주목했다. 그는 1998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김 전 지사의 정치인생은 `가시밭길'이나 다름 없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남지사에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했다가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스타 정치인'의 반열에 오르는 듯 했으나 7개월만인 2003년 9월 한총련의 미군부대 기습시위 사건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참여정부에서 그는 지역주의 타파와 학력파괴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리틀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금배지를 달지 못했다.
첫 총선 출마였던 1988년 제13대 총선까지 합치면 총선에서는 `3전 전패'의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2002년에 이어 2006년 지방선거에도 열린우리당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또 낙선할만큼 선출직과 좀체 운이 닿지 않았다.
그는 17대 대선 직후인 2008년초 당내 지역주의를 비판하며 탈당, 다시 무소속의 길로 돌아왔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그는 야권 단일후보로 경남지사 선거에출마해 당선되는 기적을 일궜다.
▲경남 남해(53) ▲경북전문대 행정학과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민선 1ㆍ2기 경남 남해군수 ▲새천년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 ▲행정자치부 장관 ▲열린우리당 경남도지부장 ▲대통령 정무특보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열린우리당 경남도지사 후보 ▲민주통합당 경남도지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