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군부 폭력성에 온 국민 격앙
- 고문치사로 민주화 요구 들끓어
- 부민협, 부산국본 결성 항쟁중심
- 서면 등 도심서 매일 시위 전개
- 전국 500만명·부산 30만명 참가
- 6·29 선언 직선제 개헌 이끌어내
1987년 6월 부산 경남(PK)을 비롯한 전국은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었다. 국민은 한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쳤고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은 결국, 막을 내렸다. 6월 항쟁은 척박한 아스팔트 위에 피워 낸 '민주화(民主花)'였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 등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은 찬바람을 맞으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매케한 최루탄 가스는 사라졌지만, 아스팔트 위에 선 국민의 손에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촛불이 켜졌다. 국민의 목소리는 30년 전 6월의 그날과 다르지 않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다. 하지만 국민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정치권은 정파 간 이해득실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첫발을 내디딘 1987년 6월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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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항쟁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6월19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 동구 부산진시장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하고 있다. 6월 항쟁 사진자료집 발췌 |
■ 시민항쟁 촉발한 4·13 호헌
박정희 정권이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자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12·12 쿠데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으로 민주화 열망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1985년 2·12총선 이후 야권과 재야 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과 비민주성, 폭력성을 비판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듬해 신한민주당이 개헌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은 6월 항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 요구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에 불이 붙자 정권 유지에 불안감을 느낀 당시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했다. 4·13 호헌 조치다.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호헌 조치는 오히려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겼고 전국에서 민주화 항쟁이 들불처럼 일었다.
■ 부산, 6월 항쟁의 성지였다
6·10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으로 상징되는 이 기간 부산의 뜨거운 투쟁이 없었다면 6월 항쟁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됐을지 알 수 없다는 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전언이다.
박종철 씨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가 주도하는 2·7 규탄대회 등에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이 전개됐다. 마침내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와 조작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낱낱이 폭로되면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맞물리면서 파급력이 더욱 커졌다. 이런 여론을 수렴하고 이슈를 주도해 나갈 구심점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부산지역의 민주세력이 항쟁에 앞장섰다.
5월 20일 부민협을 중심으로 종교계와 학생, 노동자, 야당 정치인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를 결성했다. 부산국본 결성 다음 날 대구 국본이 결성됐고, 일주일 뒤 서울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출범했다.
그 후 부산지역의 6월 항쟁은 부산국본의 주도로 진행됐다. 6월 10일 국본이 주최한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로, 서울과 부산 등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렸다. 6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그 이후 6월 29일까지 전국에서 500만 명, 부산에서만 3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시민항쟁이 전개됐다.
6월 16일 국본이 전개한 '평화 대행진'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전국 38개 시·군에서 100만 명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도 신부와 수녀 400명이 이끄는 1만5000여 명의 시민이 평화 대행진을 벌였다.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분수령이었다. 부산국본이 이날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8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서면과 남포동 일대를 뒤덮자 경찰은 진압을 포기했다.
이 기간 부산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시청 주변과 서면 등 도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가두시위에 대한 범시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부산국본에는 시민 성금이 답지했고, 택시와 버스 기사들은 차량 경적 시위로 힘을 북돋웠다.
경남에서도 6월 10일 오후 6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 3·15 의거탑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한때 경찰의 진압에 주춤했지만, 경남대 학생과 시민, 퇴근하던 노동자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신군부는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김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