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현관 위서 이틀째 고공농성
- “가방에 빵 있단 이유로 끌려가
- 하나뿐인 동생도 얼마 뒤 입소
- 폭행 견디며 함께 벗어났지만
- 동생은 결국 스스로 목숨 끊어”
문희상 국회 의장님께. 의장님 안녕하십니까. 최승우(51·사진) 씨의 이야기를 드리려 6일 편지를 씁니다. 국회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일부개정법률안 처리를 촉구하며 지난 5일 오후 3시 의원회관 출입구 지붕에 올라 단식 농성에 돌입한 ‘형제복지원 생존자’. 네, 그 최승우 씨 이야깁니다. 지난해 11월에도 최 씨는 도시철도 국회의사당역 출구 지붕에 올랐습니다. 24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다 병원에 옮겨진 그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앞서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청와대까지 486㎞를 걸어 당도했고, 국회 정문 앞에서 1000일 가까이 천막을 치고 농성한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최 씨가 부산 형제복지원에 갇힌 건 1982년 4월의 일입니다. 당시 개금중 1학년이었던 그는 하굣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습니다. 가방에선 빵과 우유가 나왔습니다. “훔쳤지?” 빵과 우유는 ‘불우가정’ 학생인 그가 학교에서 받은 급식이었습니다. 14살 소년은 부끄러움에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은 말했습니다. “훔쳤네. 혼 좀 나야겠다.”
경찰의 전화 한 통에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진 소년은 첫날 그곳 24소대장으로부터 동성 성폭행을 당합니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소년은 ‘통띠’(뒤를 내주는 남자)로 통용됩니다. “3000여 명 중 ‘통띠’라 불리며 성 노리개가 된 건 단 2명입니다. 저는 아직도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최 씨가 어렵게 털어놓은 말입니다. 개금시장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건어물을 팔던 그의 할머니가 사라진 손주를 찾아 나섰습니다. 할머니가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한 곳은, 다름 아닌 손주를 형제복지원에 잡아 넘긴 그 파출소였습니다. 최 씨의 하나뿐인 동생도 오락실에 갔다는 이유로 1985년 형제복지원에 넘겨집니다. 아는 척도 못 했지만 그래도 형제는 서로의 존재에 기대 그곳에서 자행된 폭행·학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로 삶을 버텼습니다. 1986년 10월 형제는 살아서 형제복지원을 벗어났지만, 악몽 같은 기억을 떨치지 못한 동생은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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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 모임’ 한종선(오른쪽 세 번째) 대표가 20대 국회에서 과거사법을 통과시킬 것을 여야에 촉구하고 있다. 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4년 8개월 간 가혹행위를 견딘 최 씨의 몸은 성한 곳이 없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은 그가 생의 마지막 소명처럼 움켜쥔 소망입니다. 2018년 형제복지원 입소자 명단 보도를 계기로 그해 말 20대 국회에서 과거사법 개정안이 발의되면서 희망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개정안 통과는 20대 국회가 문을 닫기 직전인 여태 기약이 없습니다. 38년 전 삶을 유린당한 소년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어린이날 다시 고공에 발을 디딘 이유입니다.
오늘 최 씨가 전하는 말로 편지를 줄입니다. “생존자들은 너무 오랜 세월 속았다. ‘앞으로’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20대 국회에서 나온 개정안은 20대 국회의 약속 아닌가. 왜 또 ‘다음’을 핑계 삼나.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의지는 20대 국회에서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만 증명될 수 있다.”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