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첫 유엔 다자외교가 순탄치 않다. 엘리자베스 여왕 2세 조문 일정이 꼬이면서 정치권과 여론의 뭇매를 맞은 데 이어 기대를 모은 우방국과 ‘정상회담’도 잇따라 성사되지 못했다.
22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2년9개월 만에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한일 정상의 만남은 ‘정상회담’이 아닌 ‘약식회담’으로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일본 ‘간담’으로 의미 축소한 한일 정상 만남…기본입장만 재확인
이날 회담은 윤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기시다 후미로 총리가 참석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BT)의 친구들’ 뉴욕 맨해튼 행사장에 찾아가 30분간 진행됐다.
대통령실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이날 비공개 회담에서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북핵 공동대응, 한일관계 개선 필요성, 자유민주주의 등 상호 공유 가치를 위한 연대 협력 등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결론은 원칙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핵 문제를 두고 “심각한 우려를 공유하고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해 나자가”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한일 두 나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외교 당국자간,정상간 소통을 계속하기로 했다.
한일 관계 개선의 최대 변수로 꼽히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 개선 방안으로 일괄 타결 방식을 언급했지만, 이날 회담에서는 두 정상 간 기본 입장만 확인했다고 한다.
이날 한일 정상의 만남에 대해 대통령실은 한일관계 복원과 발전을 위한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회담 직후 대통령실 관계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상 간 소통을 계속 이어나가고, 외교 당국 간 대화에도 속도를 높이자는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라며 “한일 간에 여러 갈등이 존재함에도 양 정상이 만나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이번 회담 이후 한일 외교 실무 당국자 간 협의 채널 정례화 등 후속 조치가 가시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더 힘을 얻는다. 이번 만남을 보는 일본과 우리 정부 간 시각 차이가 이런 관측을 방증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기시다 총리와 윤 대통령의 만남을 회담이 아니라 간담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가 이날 만남을 약식 회담이라고 지칭한 것과 다르다. 약식회담은 정상회담과 달리 주제를 정하지 않고 정상이 만나 논의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 측은 두 정상 만남의 의미를 정식 회담이 아닌 ‘간담’ 정도로 더 낮춘 것이다. 앞서 우리 대통령실에서 지난 15일 “유엔총회를 계기로 한일정상회담을 하기로 한 뒤 시간을 조율 중”이라고 선제적으로 공개하자 기시다 총리는 “그렇다면 반대로 만나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국 내 반일 여론과 두 나라 관계 개선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일본 집권 자민당도 한일 관계 정상화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강제 징용 배상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너무 많은 변수와 장애물을 넘었기 때문에 두 정상이 만난 것만 해도 일단 숨을 돌렸다”며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 공군 1호기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
●기대 모은 바이든과 회담도 48초 스탠딩 미팅만…막말 논란에 파장 예고
또 다른 우방국 정상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도 기대와 달리 성사되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오후 뉴욕 시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주최로 열린 ‘글로벌 펀드 제7차 재정공약 회의’에 참석했다. 대통령실 측은 회의 전 취재진에게 “윤 대통령은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이 회의에 초청됐다”고 전했다고 한다. 애초 기대됐던 한미정상회담이 바이든 대통령의 국내 정치 일정 등으로 사실상 어렵게 되면서 짧은 환담으로 대체된 것이다. 윤 대통령은 행사 막바지 단체사진 촬영 뒤에 각국 정상들의 대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과 마주쳐 48초간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눴다.
윤 대통령은 순방 직전에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국과 연대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요 우방국인 일본과 미국 수장과 제대로 된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통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후속 조치를 당부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제대로 된 운도 튀워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러 간 회의장에서 막말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날 취재진의 촬영 영상에 윤 대통령이 박진 외교부장관과 김성한 안보실장 등을 보면서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순방 첫날부터 예고된 미성숙 사태…여왕 장례도 뒤늦게 조문록만 작성
잇단 외교 실수는 순방 첫날 엘리자베스 여왕 2세 조문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예고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대통령 일행은 영국 런던 도착 첫날인 18일(현지시간) 애초 계획했던 웨스트민스터 홀 조문을 취소했다. 교통 상황 등과 맞물려 하루 뒤 장례식 참석 후 조문록을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공세를 이어갔다. 보좌진과 외교부의 미성숙한 해외 일정 운영이 먼저 도마에 올랐다. 김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2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조문 외교를 하겠다며 영국에 간 윤 대통령이 교통통제를 이유로 조문을 못하고 장례식장만 참석했다”며 “교통통제를 몰랐다면 무능하고, 알았는데 대책을 세운 것이라면 더 큰 외교 실패, 외교 참사”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탁현민 전 비서관은 MBC라디오에 출연해 “조문은 일종의 패키지인데 윤 대통령은 육개장 먹고 발인 보고 왔다는 것”이라며 “조문은 못 하고 운구한 다음 홀로 남아 결국 방명록을 작성한 게 조문을 대체할 수 있나”라고 강조했다. 탁 전 비서관은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영국 대사가 공석이어서 현장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황에서 외교 경험이 미숙한 대통령을 던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2일 정책조정회의에서 “(대통령이) 대형외교 사고로 물의를 빚었다”며 “왜 순방을 간 건지, 무엇을 위한 순방인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빈손 외교, 비굴 외교에 이어 막말외교 사고를 냈다”며 “참담한 마음이고 대통령실 관계자가 어떤 맥락에서 발언이 나왔는지 정중하게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혹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