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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프런티어 해양인 열전] <3> 한기철 도선사

도선사 15년 활약 … 봉사·후배 육성의 길도 그가 앞장서다

  • 김정하 한국해양대 글로벌해양인문학부 교수
  •  |   입력 : 2022-02-14 20:05:55
  •  |   본지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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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바다 동경해 해양대 진학
- 현대상선 근무한 뒤 도선사 도전
- 고액연봉 받지만 위험 요소 많아

- 2019년 러시아배 광안대교 추돌
- 사고수습 돕고 원인 분석해 논문
- 까다로운 항공모함 도선 경험도

- 어려운 이웃 위해 연탄기부 앞장
- 모교서는 진로특강·후배 후원도
- 선한 영향력에 대통령 표창 받아

바다에도 길이 있다. 수면의 항적(航跡)은 포말로 사라져도 바다에는 엄연히 항로가 있다. 특히 강제도선구역에서 500t 이상 외국적선과 국제항로 취항 국적선, 2000t 이상 국내 내항선은 반드시 도선사의 길 안내를 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에는 260여 명의 도선사가 12개 도선구에서 활동 중이며 부산항도선사회에도 56명이 소속돼 있다. 부산항에서 15년간 뱃길을 인도해온 한기철(63) 도선사는 빈곤 계층과 후배를 위한 봉사와 후원에도 10여 년을 헌신해왔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바다에서의 본업과 육상에서의 봉사, 후원이 그의 삶에서는 튼실하게 이어져 왔다.

■바다는 내 운명

한기철 도선사가 2016년 10월 부산항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10만4200t급)를 도선한 뒤 갑판 위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한기철 제공
한기철이 바다에서 진로를 찾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인천 답동에서 한태섭과 임정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중학생 시절 서울로 이사하고도 어릴 적 본 바다에의 동경이 여전했다. 고교 시절 어머니의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도선사를 장래 희망으로 한국해양대에 입학했지만 당시엔 그 포부를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 해 고작 두 사람의 도선사를 뽑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대학 졸업 후 해군 복무를 마치고 4년간 현대상선에서 배를 타던 한기철은 갑작스러운 하선이 불가피했다. 지인에게 당한 사기로 부도 위기에 처한 아버지 회사의 회생이 급선무였다. 이후 3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회사를 정상화시킨 그는 미련 없이 배로 돌아왔다. 자신의 장래 희망을 기억하던 한국해양대 동기 양희준 선장의 조언을 따라서였다. 다시 현대상선에 입사한 한기철은 때가 오길 기다리며 10여 년간 묵묵히 배를 탔다. 마침내 그가 배에서 내린 2006년에는 해운이 주도한 무역의 활황으로 도선사의 신규 임용 인원이 13명까지 늘어났다.

■도선사, 고액 연봉…위험한 직업

한기철 도선사가 도선을 위해 사다리를 타고 5층 높이의 대형 선박에 오르고 있다. 한기철 제공
‘해기사의 꽃’이라 불리는 도선사는 선망받는 직업이다. 2억 원 이상의 연봉에 16일간 근무하면 10일의 휴가가 주어진다. 적성에 맞는 일로부터의 성취감도 보너스로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도선사가 되긴 매우 어렵다. 6000t 이상 선박에서 선장으로 3년 이상 승선해야 시험 볼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평균 경쟁률 10 대 1의 시험에서는 선박 운용, 항로표지, 법규, 해사영어에서 과락 없이 평균 60점을 넘겨야 한다. 방대한 범위에서 출제되는 네 개의 서술형시험문제 답으로 90분 이내에 A4 용지 20매를 채워야 한다. 한기철도 첫해 응시에서는 쓴맛을 봤고 가평의 고시원에서 1년을 보내고야 뜻을 이뤘다.

도선 업무도 쉽지만은 않다. 선박과 예인선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을 매 순간 정확하게 계산하며 파도가 높거나 조류가 강할 때는 더욱 주도면밀하게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그러자면 능숙한 외국어 구사력에 강한 책임감과 집중력, 순간 대처능력에다 강인한 체력까지 갖춰야 한다. 그러고도 비바람 몰아치는 어두운 밤 사다리를 타고 5층 높이의 대형선박을 오르내리는 일은 위험천만이다. 베테랑인 한기철 도선사조차 몇 년 전 낡은 사다리 매듭이 끊어지며 바다로 추락해 자칫 생명을 잃을 뻔했다. 게다가 화물적재량 증가에 따라 배의 덩치가 갈수록 커져 도선 업무도 점점 어려워진다. 특히 항공모함 도선은 비대칭 갑판 아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임시로 설치된 바지선에 선체를 접안시켜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한기철 도선사가 9만7000t급 니미츠호를 비롯한 로널드 레이건호 등 항공모함 2회 도선을 나름의 ‘업적’으로 꼽는 이유다.

■빈곤층과 후배를 위한 봉사·후원

한 도선사가 산동네에 연탄 배달 봉사를 하는 모습. 한기철 제공
2013년 한기철 도선사는 새로운 길을 만났다. 토성동 배드민턴모임에서 알게 된 ‘부산연탄은행’ 대표 강정칠 목사의 권유를 받고 나서다. 이후 도선사는 산동네 연탄 기부와 배달, 주 4일의 무료 급식과 도시락 배달, 청소년 특강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전날 오후 6시부터 12시간의 철야 근무를 마친 다음 날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놀라고 감탄한 건 강정칠 목사였다. 도선사는 이지적이지만 차갑고 폐쇄적인 보통의 전문직과 전혀 달랐다.

“한 도선사님은 요즘 세상에 웬 연탄이냐고 묻기만 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남에게 손을 내밀겠느냐는 호소에 즉시 행동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연탄 한 장이 아쉬운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진정성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한기철 도선사로선 그게 보은의 방식이었다. 매월 60달러의 수당으로 버티던 3항사 시절 미국 LA 선원교회의 황식 목사와 시애틀의 최원정 목사, 싱가포르의 노효종 목사에게서 받은 도움을 잊지 않은 그였다. 그래서 평소 ‘상생(相生)’을 강조해온 한기철 도선사는 부산항도선사회 회장 시절에도 ‘제 실속 없는 남의 일 돕기’로 유명했다.

2019년 태풍의 내습을 앞둔 시점에는 출항을 원하는 선사를 대리해서 항만청과의 중재에 나섰다. 같은 해 러시아 선박이 광안대교를 추돌했을 때는 사고 수습을 돕는 한편 사고 원인에 관한 논문을 써서 한국항해항만학회에서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자력 도선을 쉽게 풀어 설명한 책 ‘항내도선’을 후배와 공동 집필해 국적선사와 해군, 해양경찰 등에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한기철 도선사의 봉사 소식이 알려지자 주위의 해기사들도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부산항 도선사 15명이 퇴직 때까지 매월 일정액을 기부하기로 약정했고 마산항과 울산항 도선사들까지 힘을 합쳐 매년 2만 장의 연탄 기부를 성사시켰다. 그 기부의 바람이 도선사 60명이 50만 원씩을 각출해 부산신항에 입항하는 선원들을 위해 통근차를 마련해주는 일로 이어졌다.

한기철 도선사는 후배들의 길 안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자신이 졸업한 대성고 서경숙 교사가 2012년부터 개최한 ‘직업탐색의 날’ 행사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갔다. 그로부터 꾸준히 해양 분야에 뜻을 둔 후배를 돌본 결과 지금은 무려 15 명의 후배가 선장 기관장 도선사 해양경찰 등에서 일하고 있다. 또 부산해사고에서 이상도 교사와 김창한 교사로부터 9년간 매년 10명의 학생을 추천받아 1인당 50만 원씩의 용돈을 지원하면서 밴드에 만든 ‘대화방’을 통해 상담해주고 주기적인 만남도 이어왔다.

“도선사님의 후원과 격려는 당대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도움을 받은 후배들이 또 다른 자신의 후배를 돕는 릴레이를 이어가리라 봅니다.” 서경숙 교사는 한기철 도선사 덕분에 40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떠나는 발길이 가볍다고 말했다. 마침내 한기철 도선사는 ‘봉사왕’이란 별명을 얻었고 2016년의 부산시교육감 감사장에 이어 2020년 제25회 ‘바다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정부의 저탄소 정책으로 연탄 수급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전해진 올 겨울, 한기철 도선사는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한편으로 후배를 위한 행사를 거르지 않으려고 ‘줌(zoom)’으로라도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 덕에 누군가는 가난에 맞설 용기를 추슬렀고 누군가는 선배의 뒤를 이어 바다에서 일할 뜻을 세웠을 것이다.

18세기 이래 영국의 산업혁명을 북돋고 지탱한 힘은 기술 발달과 기계 발명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공업지대 아이들이 자부심에 넘쳐 부르던 “우리 아빠는 자랑스러운 철강노동자”라는 동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했다. 한기철 도선사가 산동네와 학교에서 행한 봉사와 후원 역시 해양인을 응원하는 노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도움말씀 주신 분들 = 이권희 한국해기사협회 회장, 강정칠 부산연탄은행 대표, 채양범 한국해양대 교수, 서경숙 대성고 교사, 김창한 부산해사고 교사

※ 공동 기획=국제신문·한국해양수산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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