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가하거나 병원 검진받아

"비바람이 거셌습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31일 오후 부산 김해공항 국제선 1층 입국장. 몰려든 취재진 앞에서 이상관(69) 씨는 짧은 두 마디만 남기고 가족과 재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왼쪽 다리에 감긴 깁스붕대는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일본 나가노현 산악지대인 '중앙 알프스' 등반에 나섰다가 기상 악화로 목숨을 잃을 뻔한 한국인 등산객 16명이 귀국했다. 이들은 나고야발 대한항공 KE 754편을 타고 이날 오후 4시50분께 부산에 도착했다.

가족은 도착 1시간 전부터 공항에 모여 숙연한 마음으로 이들을 기다렸다. 입국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등산객들은 "착잡하다. 나는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달아나듯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 흩어져 입국장을 빠져나가면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을 따돌린 탓에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상당수가 가족과 귀가하거나 건강검진차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20명의 일행은 지난 29일 오전 6시께 중앙 알프스 호켄다케(寶劍岳·2931m)의 '호켄산장'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기상은 괜찮았다. 적은 비가 내렸고 안개만 낀 상태였다. 그러나 등반 시작 1시간 만에 상황은 크게 나빠졌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도 거세졌다. 보조스틱 없이는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안개로 시야가 10m가량밖에 확보되지 않아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거나 하산 길을 찾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20명의 등반팀은 일렬로 대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예정대로 호켄산장으로 오른 8명과 도중에 하산한 2명, 대피소로 몸을 피한 4명, 전날 산장으로 간 1명 등으로 길이 엇갈렸다. 나머지는 어느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중간에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자"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1분을 그냥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고 했다.

목숨을 잃은 박인신(70) 씨는 등반 중 다리 부상으로 가장 먼저 낙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혜재(62) 씨는 이날 오후 4시 그를 발견한 뒤 이튿날 오전 5시까지 곁을 지켰지만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숨진 채 발견된 4명의 유가족은 대한항공 정기(KE 53)편을 타고 이날 오후 1시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들은 니가타현 주재 한국 총영사관과 시신 수습과 장례절차 등을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