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청 손미혜 씨가 유치환우체통 앞에서 북항을 배경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 고령화율 높고 폐·공가 많지만
- 사람냄새 풍기는 이야기 가득

- 동구청 담당 공무원으로 발품
- 요강전시회·유치환우체통 등
- 주민들이 주체 돼야 실패 안해

지난 주말 부산 동구 초량 산복도로의 '유치환우체통'. 가파른 계단을 오른 사람들이 미처 가쁜 숨과 땀을 훔치기도 전에 2층 전시실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북항풍경에 넋이 빠져버린다.

산복도로에 '르네상스'를 입혀 산복도로 주민들의 삶에 활기와 변화를 시도한 지 삼 년째다. 특히 동구청은 이곳 산복도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역사와 문화로 옷을 입혀 '이바구'를 탄생시키는 일에 신명을 다하고 있다. 차제에 '문화와 역사가 없다'는 동구의 묵은 앙금을 씻어야겠기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귀를 열었다. 동구는 원도심 산복도로 행정구역 전체 면적 54.01㎢의 13%에 불과하고 인구도 적은 데다 65세 이상 고령화율이 15%로 서구 다음이고, 산복도로 주변 폐·공가 구성비도 높아 제반여건이 열악하지만 이를 역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진흙에 묻힌 보석을 찾는 일이었다.

정영석 동구청장을 비롯, 문화체육과 김태수(과장)·윤종국(팀장)·손미혜(주무), 도시재생과의 최용호(팀장)·성연희(주무) 등이 이른바 '산복도로 이바구열차' 승무원(?)으로 나섰다.

'유치환우체통'에서 봉사자를 독려하고 발품을 파는 손미혜(43) 씨.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가 고향인 그는 태어나던 해에 김해로 이사, 합성초등학교와 김해여중·고를 졸업했다. 고3 때 부산 범일동에 정착하면서 부산대를 졸업하고, 1995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동구청에서만 18년째 근무하고 있어 어느 누구보다 동구사랑이 각별하다.

"산복도로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보물창고지예. 근현대 역사가 골목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고 그 기억들을 지닌 어른들이 산증인으로 이곳에 아직 살고 계시기 때문이지예."

원도심에서도 산복도로 지역은 삶이 고단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이른바 낙후지역이라 말들 하지만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이곳처럼 정이 넘치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간 산복도로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이들 삶을 꿰뚫고 하이 얘기다.

지난해 9월부터 이 일을 맡으면서 발이 부르트도록 골목을 누비며 계단을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말 붙이기도 힘들어 서먹거렸지만 어느 날 허물없이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이곳 사람들은 마냥 살갑고 인정이 많으며 자기들을 이해해주는 작은 일에도 감동했다. 이젠 사람들 만나는 일이 즐겁다. 사무실과 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불편함이야 있지만 이 일 맡은 것이 보람되고 자랑스럽다고 손미혜 씨는 말한다.

김민부전망대나 이바구공작소, 유치환우체통의 터는 버려진 땅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잡초만 무성하고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진동했다. 여름이면 모기 떼 등쌀에 몸살을 앓아 왔다. 사람들은 그런 터에 공공시설을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코웃음으로 넘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심지어는 김민부와 유치환과도 관계없는 시설이라며 거부감도 컸다.

그러나 손미혜 씨는 이곳이 정점이 되어 산복도로 사람들의 생활에 윤활류가 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로 관심이 확대되면서 "우리도 무언가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가져주길 기다렸다.

이바구공작소에서 '요강전시회'를 열 때 "요강, 이 더러운 것을 무엇 때문에 전시한다 카노. 참 할 일도 지지리 없던 가베"라고 손가락질하던 한 할배가 "이거 3대에 걸쳐 쓰던 거요. 반질거리게 씻고 또 씻었어요"라며 목단 그려진 사기요강을 가져왔을 때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정말 어렵게 조심스럽게 마련한 일들에 비로소 이곳 주민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골목길에 우두커니 나앉았던 마을 어른들이 손자를 데리고 놀러 올 곳이 생겼고, 산동네에 도서관과 전시장이 문을 열면서 도회지 사람들이나 누리는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참에 깨끗한 환경을 보고 내 집도 깨끗하게 꾸미고 싶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으면 좋겠다.

장롱 속에 깊이 들어 있던 결혼사진과 회갑연사진이 전시되었을 때 내 사진도 이야기감이 되는구나, 우리 동구에 이런 훌륭한 분들도 있었구나 하는 공감대가 바야흐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공감대를 바탕으로 더 큰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내어본다.

손미혜 씨는 벌써 다섯 번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그 주체가 마을사람들이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들과 함께 따뜻한 가슴으로 얘기하고 기획하는 일은 실패가 없었다. 지난 7월부터 백제병원에서 이야기와 함께 걷는 칙칙폭폭 어릴 적 새끼줄 열차를 닮은 '이바구열차'가 시범운영되고 있다.

범일동 호랭이길과 이중섭계단, 좌천지역개항가도(街道) 역사문화관 등이 산복도로 후속사업의 일환으로 준비작업이 척척 진행되고 있다. 내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단지 산복도로를 찾아오는 분들이 해운대처럼 볼거리를 찾는 관광지로서가 아니라, 산복도로의 삶을 들여다 보는 곳으로, 그리고 나의 삶을 함께 성찰하는 곳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얘기한다. 그간 소외당하면서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리라.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산동네를 변화시킬 것이다. 산동네 행복시대를 창출할 것이다. 손미혜 씨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오늘도 이바구공작소를 또 오른다.

010-7791-5984 /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