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들피리 불면 소원이 이뤄진대
- 뱃일하는 아빠 집에 오시라하고
- 부자돼서 엄마옷도 맨날 사줄게
- 태권도학원도 다시 다니고 싶다

- "아저씨가 연주법 알려준다는데
- 잠깐 따라갔다와도 되제 엄마"
- 엄마는 소리 없이 흐느꼈지만
- 소년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햇살이 맑은 날입니다. 어제까지 내렸던 비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사흘이 넘도록 밖에 못 나가던 남이는 장난감이랑 종이배를 두 손에 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남이가 사는 집은 새마을이라 불리는 지게골과 못골 사이에 걸쳐있는 대연고개 언덕배기에 있습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코끝을 간지럽게 합니다.
어제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엄마와 동생이랑 온종일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태권도장에 다녔지만 엄마가 이번 달부터는 다니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태권도장에 가면 하루가 금방 갈 정도로 재밌지만, 집형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태권도장 마치고 오려면 점심나절이나 되어야 합니다. 남이는 태권도장이 있는 고개 너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다 옥상 바닥에 고인 물을 보고 빙그레 웃습니다.

"이건 아빠 배."

어제 엄마가 접어주신 종이배를 고인 물에 띄워 봅니다. 아빠는 머나먼 바다에 나갔다 몇 년 만에 돌아오시는 선원입니다. 남이는 여섯 달 전 아빠를 철나고 처음 만났습니다. 엄마가 아빠를 마중 나가셨는데 길이 어긋났는지 몇 번이고 나갔다 들어오고를 반복했습니다. 집에서 혼자 부엌문 앞 옥상계단에 앉아있던 남이 앞으로 낯선 어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엄마 안 계시나?" "엄마 밖에 나갔는데요? 근데 아저씨 누군데요?"

그분은 좀 당황한 듯 뒤돌아 나갔습니다. 남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엄마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누구 안 왔제? 이 사람이… 어디로 갔노?"

"방금 어떤 아저씨 왔다 갔는데?"

"어떤 아저씨? 엄마야, 혹시 니 아빠 아이가?"

동생을 업고 엄마는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엄마는 곧 그 아저씨랑 함께 돌아왔습니다. "어째 아빠랑 아들이 서로를 못 알아 봅니꺼?"

엄마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남이는 그때서야 그분이 아빠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빠는 남이를 젖먹이였을 때 보고는 처음인지라 인사를 할지 머뭇거리다 아저씨란 말에 당황했던 겁니다.

아빠는 저 멀리 피라미드도 보고 미국에도 아르헨티나에도 갔다 왔다고 합니다. 남이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멋져 보였습니다. 아빠가 계속 같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한 달 전에 다시 배로 갔습니다. 아빠가 떠나시던 날, 남이는 서운해서 막 울었습니다. 아빠는 남이를 꽉 안아주고는 돈 많이 벌어서 금방 온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습니다.

"아빠는 배타고 아르헨티나! 바나나 이마안큼 가지고 온다!!"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 리'에 나왔던 아르헨티나를 남이는 용케 기억했습니다. 남이는 신이 나서 고인 물을 찰박거리다가 저쪽 건너 쌍둥이산을 손망원경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구화학교 밑으로 풀밭이 새파랬습니다. 거기엔 잠자리도 있고 여치도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면서 밖으로 놀러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태권도장을 마치려면 아직도 한참 이른 시간입니다. 남이는 또 태권도장이 있는 고개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남아, 남아! 어디 있노?"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남이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다친다. 사살 내리온나. 엄마 물 받고 마당청소 하니까 방에 들어가 숙제하고 있어라."

남이는 밖에 나가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습니다. 방에 들어오니 동생은 자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깰까봐 조심하며 어제 엄마랑 하던 받아쓰기 공책을 꺼내들었습니다. 하지만 남이의 눈앞에는 친구들 얼굴, 여치, 방아깨비가 어른어른합니다. 억지로 눈을 비비고 받아쓰기 문장을 써보지만 자꾸 창가 쪽으로 눈이 갑니다. 문득 사흘 전에 호철이가 잡았다가 놔줬던 달팽이가 떠올랐습니다. 집이 없는 민달팽이는 비가 오면 집을 짓는다면서 고갯길 버드나무 옆 공터에 바닥을 파고 놓아주었던 것입니다. 달팽이는 얼마나 멋진 집을 지었을까요? 남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앞 마당가로 나가 엄마 편을 빠끔히 훔쳐보았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물도 받고 마당청소를 하느라 분주합니다.

대연고개 언덕길

대문이 열려있어 몰래 나가기엔 안성맞춤입니다. 마침 엄마가 호수를 걷고 있느라 돌아서 계셨습니다. 들킬세라 살금살금 벽에 붙어 가자 대문 밖이 훤히 보입니다. 대문 앞 계단으로 내려서서 엄마를 한 번 보고는 나갔다 온다고 말할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대문에서 달리면 3분도 채 되지 않아 고갯길과 언덕 공터가 나옵니다. 금방 갔다 오면 엄마도 크게 꾸짖지는 않을 겁니다.

'달팽이만 보고 다시 와야지'.

남이는 이렇게 생각하고 빙긋 웃었습니다. 골목길로 내려서자 저쪽에 고갯길이 보입니다. 남이는 골목길을 재빠르게 달려갔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남이의 귓가를 스쳐갑니다. 옆집 용이네를 지나고 옥수수 할아버지네 밭도 지나자 금방 버드나무 옆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남이는 표시해둔 구멍을 찾아 땅바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아무리 찾아도 달팽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집을 짓고 멀리 가버린 걸까요? 울상이 된 남이는 몇 번이고 공터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한참인가 달팽이를 찾던 중에 신기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익살스러운가 하면 슬프고, 슬픈가 하면 재밌는 희한한 소리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버드나무 돌담에 한 아저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아저씨의 입가에는 버드나무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남이는 자신도 모르게 버드나무 밑으로 다가갔습니다. 알지 못할 곡조가 모두 흐르자 아저씨가 버들잎을 입가에서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이를 가만 바라봅니다. "아까부터 뭘 그리 찾고 있니?"

"달팽이요, 며칠 전에 놔줏는데 없어지가꼬요." "그래?"

"아저씨, 그란데 그거 뭔데요? 한 번만 더 불러 줄래요?." 남이는 소리가 신기해서 아저씨에게 부탁했습니다.

"이거? 이건 버들피리란다. 이걸 불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진짜요?"

아저씨는 또 버들피리로 연주를 합니다. 남이도 들어봤던 '아빠하고 나하고'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주변에서 채송화랑 봉숭아꽃이 막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아빠 생각이 나서 눈가가 시큰해지기도 합니다.

"이거 어떻게 부는지 가르쳐 줄까?"

노래가 끝나자 아저씨가 버들잎 하나를 남이에게 건네어 주었습니다.

"버들잎을 접어서…."

아저씨가 가르쳐 준대로 불어보지만 소리가 잘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불자 '삐이익~!' 하고 잠시 소리가 났습니다. 남이는 얼른 소원을 빌어보았습니다. "아저씨, 이거 불면서 소원 빌면 진짜 들어줍니꺼?"

아저씨는 돌담에서 내려와 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신기하지? 아저씨 따라가면 잘 불게 가르쳐 준다. 그럼 버들피리만 불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남이의 가슴이 환해졌습니다. 이제 버들피리만 배우면 아빠도 오시고, 태권도장도 갈 수 있습니다.

"진짜요? 그라믄 아르헨티나도 가고, 바나나도 막 묵어도 되요?"

아저씨는 웃으며 남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진짜지. 그럼 아저씨하고 가자. 버들피리 배우러 갈 거지?"

"예! 빨리 가지요?"

아저씨는 잡은 손을 이끌고 천천히 고갯길로 향했습니다. 남이는 너무나 기뻐 신이 납니다. 버들피리를 멋지게 불어서 친구들 앞에서 뽐도 내고 싶었습니다. 부자가 되어 엄마한테 예쁜 옷도 매일 사드려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엄마한테 말하고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벌써 고갯길을 지나서 시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입니다. 너무 멀리 가면 허락받고 오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아, 맞다! 아저씨, 엄마한테 말 안하고 왔는데요. 금방 갔다 올게요."

아저씨는 남이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습니다. "아저씨가 나중에 연락해 줄 거야, 가자."

"아니요, 바로 요 앞에 바로 우리 집인데 금방 갔다 올 게요."

아저씨가 괜찮다며 어깨를 잡으려는데 남이는 얼른 뿌리치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얘!"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저씨, 잠깐만 기다리요!" 하고 급하게 소리를 쳤습니다. 혹시나 아저씨가 자기를 두고 혼자 갈까봐 숨이 닿도록 달려갔습니다. 대문가에는 주인집 아줌마와 엄마가 아직도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엄마를 보자 말자 남이는 소리쳤습니다.

"엄마! 나 피리 부는 거 배우러 가도 되제?"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있다 아이가, 버들피리 부는 아저씨 따라가면 아르헨티나도 가고, 하이튼 간에 빨리 가야 된다!"

엄마는 말을 듣다가 빗자루를 놓고 남이가 있는 대문가로 나왔습니다.

"야가…, 야가 지금 뭐라카노?"

"저기 시장 가는 길에 아저씨 기다리고 있다니깐?"

남이는 애가 달아 손가락질을 합니다. 물을 끄고 얘기를 듣던 주인집 아줌마가 멍한 표정의 엄마에게 한마디 합니다.

"혹시 이상한 사람 아이가?"

"예?" "안 그래도 요새 텔레비 보면 유괴고 뭐시고 시끄럽더라 아이가?"

"에이…, 이 동네에서 무슨…."

말은 그러면서도 표정이 굳은 엄마는 남이의 손을 꼭 잡습니다.

"남아, 다시 말해봐, 누구라꼬? 그 아저씨 어딨는데?"

꽉 쥔 손이 아팠지만 남이는 겁이 덜컥 나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남이는 엄마와 함께 서둘러 고갯길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제일 높은 대연고개 공터까지 가도 아저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 아저씨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 아래 도로로 빵빵거리는 버스 경적이 작게 들려옵니다. 한참을 둘러보던 엄마는 남이와 버드나무 아래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피리 가르쳐 준다고 했나?"

"응, 아저씨가 따라가서 피리 배우자고…. 신정시장까지 따라갔다가 엄마한테 말할라꼬 왔다."

"아이고…!" 엄마는 갑자기 무릎을 꿇으시더니 한참동안 남이를 꽉 안았습니다. 남이는 영문도 모르고 안겨 있다가 귓가에 뭔가 따뜻한 게 흐르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 엄마는 대답이 없습니다.

"엄마 우나?"

엄마는 남이를 더욱 꽉 안을 뿐입니다. 남이는 머리 위 버드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실려 춤을 춥니다. 돌담에는 아까 불던 버들잎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부자리에서 동생을 재우던 엄마는 남이를 불렀습니다.

"남아, 내일부터 태권도장에 다시 갈까?" "어? 진짜로?"

남이는 너무 좋아 엄마를 안았습니다.

"그래 좋나?" "응, 어… 근데 엄마…, 아, 아이다. 아이다!"

남이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원, 자슥이 싱겁구로."

잠시 후, 엄마도 동생도 잠들었습니다. 남이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태권도장에 가는 게 너무 기뻤지만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그 아저씨, 거짓말쟁이다. 소원 들어준다 해놓고, 한 개는 들어주고 또 한 개는 와 안 들어 주노?'

이리저리 뒤척이던 남이도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남이는 배에서 돌아온 아빠 꿈을 꾸었습니다. 대연고개 언덕으로 올라온 아빠는 남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습니다. 쌍둥이 산에서는 잠자리들이 날아다녔고, 여치와 방아깨비가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버들피리 소리에 남이는 잠결에도 미소 짓는 것이었습니다.


■지게골은

- 일제강점기 이주민이 모여 형성된 마을

현재 교통 요지인 문현 교차로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골짜기 잔등 일대를 옛날에는 지게골이라 불렀다. 현재는 도시철도 2호선 역명으로 지게골이 쓰이고 있다. 여기서 지게란 대문 역할을 했던 사립문에 받쳐 놓은 지게 작대기를 이르는 것으로 '지게문'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게'는 밖과 안을 연결시키는 문(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 문(門)에 고개 현(峴)을 쓴 문현동의 이름 유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지게골과 붙어있는 대연고개는 못골 시장으로 연결되는 큰 길이었으나 경사가 매우 심했다. 이 고개를 낮추려고 일제강점기부터 여러 공사를 거쳐 현재의 완만한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아직도 이 부근을 '새마을'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 다른 이름에는 사실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일제강점기 영주동·초량 등지의 철거민 이주 정책으로 밀려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 정착했는데,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 해서 신마치(新町)라 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신정(新亭) 마을이라고 개명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새마을'이라 부르곤 한다.

배길남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