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경관에 치우친 부산관광
- 단체보다 개별여행 추세 맞춰
- 콘텐츠·이야기로 끌어들여야

- 산복도로 원도심 스토리 투어
- 1023일 수도였던 흔적 활용해
- 기억·기념·자랑할 공간으로 특화

- 인기 명소된 전주 한옥마을처럼
- 건축·문화·역사에 체험 압축하고
- 해외 아우슈비츠·킬링 필드같이
- 다크 투어리즘 맞춰 자원화해야

전 세계에서 부산만이 가진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란수도'다. 부산은 전쟁으로 수도가 통째 이전해온 세계 유일의 공간이다. 6·25전쟁 기간 1023일(1950년 8월 18일~10월 26일, 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4일) 동안 부산은 대한민국 수도였다. 인구 40만 명의 부산은 단숨에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입법·사법·행정 삼권은 물론 외교·금융·경제·문화·교육 등 국가의 모든 기능이 부산에 몰렸다.

	5일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옆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중구 대청로 일원. 피란수도 시절 정부청사와 대법원이 자리했던 동아대 부민캠퍼스를 비롯해 미국영사관, 한국은행 건물 등이 보인다. 정치·행정·생활·문화·경제 기능이 집결돼 피란수도의 거점이었던 대청로 곳곳엔 지금도 당시 건축·문화 자산이 남아 있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그때는 난리 탓에 정치적으론 격동, 경제·사회적으론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하지만 부산은 뜨거운 가마(釜)로 죽음과 고통을 녹여냈다. 토착민은 피란민을 따뜻하게 포용했다. 부산은 삶과 죽음, 사람과 문화·예술을 융합하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부산의 상징인 다양성 개방성 역동성도 이렇게 형성됐다. 지금도 부산 곳곳엔 전쟁의 격랑을 이겨낸 생생한 드라마가 숨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때로 소중한 것은 너무 쉽게 잊힌다. 피란수도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자랑하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부산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피란수도의 흔적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국내 관광객이 기억한 부산 관광지(2014년 부산관광실태조사)는 1위 해운대해수욕장(23.6%), 2위 태종대(12.9%), 3위 광안리해수욕장(11.9%), 4위 누리마루APEC하우스(동백섬·7.1%), 5위 광안대교(6.7%), 6위 자갈치시장(5.5%) 순이다. 바다 경관 일색이다. 부산만의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외국 관광객이 다시 방문하고 싶은 관광지 중에도 피란수도와 관련된 곳은 29위 40계단테마거리(0.6%)와 부산근대역사관(0.6%), 48위 보수동 책방골목(0.2%), 53위 임시수도기념관(0.1%) 정도다. 그렇다면 피란수도 이야기를 부산 대표 관광상품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런 논의는 바다로만 쏠린 부산 관광의 대안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피란수도의 관광 자원화는 원도심 재생은 물론 부산의 도시 브랜드 알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대청로는 역사 공원

	지난해 10월 부산 동아대 석당박물관 앞에 '피란수도 부산 야행' 행사를 알리는 조형물이 서 있다. 국제신문 DB

산복도로 아래 부산 중구 광복동과 보수동, 대청동을 가로지르는 대청로는 피란수도의 거점이다. 대청로 인근에 밀집된 건축물과 공간들은 피란수도의 상징 경관이었다. 피란수도 시절 대청로 일원의 건축·문화 자산은 정부청사(동아대 박물관)를 비롯해 66곳이다. 이 가운데 정부청사 부산경무대 미국영사관 등 7곳은 아직 원형이 보전돼 있다. 국제시장 부평시장 한국전력(상공부) 등 11곳은 일부 보전돼 있고, 중앙우체국 이화여대 국회의사당(문화극장) 국제신보(국제신문 전신) 등 48곳은 원형이 완전히 변형됐다. 이 외에도 연계시설로 대청로 주변 산복도로 피란민 주거지와 남구 대연동 UN묘지(UN기념공원)가 원형이 일부 또는 모두 보전된 채로 남아 있다.

대청로의 건축물 현황만 봐도 피란수도 부산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정부는 경남도청(동아대 부민캠퍼스 자리)을 중앙청사로, 도지사 관사(임시수도기념관)를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했다. 국회는 도청의 무덕관과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했고, 법원은 현 동아대 법학대학원 건물에서 형법·형사소송법 등 우리나라 형법제도의 틀을 갖췄다.

이 밖에도 대청로엔 한국은행, 각국 대사관, 상공회의소, 중앙관상대, 언론사, 제3 육군병원, 성당·교회, 국립국악원, 서울대 등 교육·문화·국방·상업시설이 집중됐다. 보수동 책방골목과 대청동 인쇄골목은 각종 정부 홍보물뿐 아니라 민간의 정기 간행물, 전시문학 작품이 만들어진 문화의 산실이었다.

■어떻게 다듬을까

피란수도를 활용하기 위한 시도는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을 하나로 엮고 구체화하면 피란수도 관광 자원화의 길이 보인다.

좋은 계기가 있다. 부산발전연구원과 부산시는 피란수도 건축·문화 자산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말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와 부산근대역사관 등 대청로 일원 14곳을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신청했다.

피란수도 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관광객 유치에 상당한 동력을 얻게 된다. 홍보 효과도 크다. 전문가들은 세계유산 후보군 중 근대유산은 피란수도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크게 평가한다.

최근 시가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과 부산근대역사관을 묶어 부산근대역사박물관으로 조성하고, UN기념공원 인근 11만 ㎡ 땅에 2023년 개관을 목표로 부산전쟁기념관 건립을 추진(본지 지난달 31일 자 1면 등 보도)하는 것도 긍정적 요인이다.

부산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원도심 스토리 투어를 피란수도에 맞춰 특화할 수도 있다. 시와 중구가 2011년부터 시행 중인 대청로 '국가 임시수도 상징거리 조성 사업'의 도움도 받을 만하다.

이같이 흩어진 사업들을 한데 합치는 방법은 없을까. 전주 한옥마을처럼 건축·문화·역사 유산과 볼거리, 체험 콘텐츠가 압축된 가칭 '피란수도마을'을 구상해볼 수 있다.

특히 시는 '2030 부산 비전'의 하나로 대청로 노면전차 복원 계획을 제시했는데, 노면전차는 피란수도마을을 순환하는 이동수단이 될 수 있다. 노면전차가 다니는 길을 위주로 피란수도마을의 유산을 테마별로 묶는 것도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효과적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주 한옥마을 역시 전주시가 2003년 상표 등록을 하고, 2004년 전통음식촌을 만들면서 전국적 관광 명소가 됐다는 점을 부산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 피란수도도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왜 피란수도인가

지금까지 부산 관광은 '바다의 경관'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다. 경관 위주의 관광은 한때 대다수를 차지했던 단체관광객의 기호에 적합하다.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며 '와~' 하고 탄성을 지르는 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급속히 바뀌고 있다. 부산 외국 관광객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중국 관광객의 사례를 보자. 한국관광공사와 면세점업계 자료를 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중국인 중 개별 관광객의 비율이 59.1%로, 단체(40.9%)보다 훨씬 높았다. 중국 관광객 10명 중 6명은 단체가 아닌 개별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단체관광에서 개별자유관광(FIT)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개별 관광객은 경관이 아니라 이야기와 콘텐츠를 찾아 움직인다. 더는 바다만으로 관광객을 부산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따라서 피란수도는 부산이 꺼낼 수 있는 맞춤형 대안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피란수도 시절 한국인의 삶이 녹아 있는 무구한 이야기로 개별 관광객에게 호소할 수 있다.

가능성은 확인됐다. 동아대 석당박물관과 서구는 지난해 10월 7, 8일 '피란수도 부산 야행' 행사를 열었는데 이틀간 5만5000여 명이 찾아 부산의 이야기를 듣고 피란 시절을 체험했다.

피란수도는 요즘 주목받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상품으로도 알맞다. 다크 투어리즘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 직접 체험하면서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이다. 미국의 911메모리얼파크,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국내의 서대문형무소와 거제포로수용소 등이 대표적이다. 피란수도에도 반성과 교훈, 그리고 휴머니티가 있다.

부산발전연구원 김형균(부산학연구센터장) 선임연구위원은 "FIT에 대응하려면 섬세한 콘텐츠가 필요하다. 차별화된 이야기를 발굴하고 소구력 있게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피란수도는 부산 관광의 대안과 매우 잘 접목된다"고 말했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pear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