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광안대교와 충돌 사고를 낸 러시아 선적 씨그랜드호의 조타실 CCTV 영상을 5일 부산해경이 공개했다. 1. 용호부두에서 출항하며 계류된 요트를 충격하는 장면 2. 광안대교와 충돌한 후 갑판 위에서 상황을 살피는 선원들 3. 광안대교에 부딪혀 부서진 선박 앞부분. 부산해경 제공

지난달 28일 러시아 대형 화물선 씨그랜드호(5998ｔ)가 광안대교를 들이받은 사고(국제신문 지난 1일 자 9면 등 보도)는 술을 마신 선장이(사진) 판단과 조종을 잘못해서 발생했다는 중간 수사 결과가 나왔다.

부산해경은 5일 수사 진행 상황 중간 브리핑에서 씨그랜드호의 항해기록저장장치(VDR)와 선수 방면 외부 CCTV 영상을 공개하며 이같이 밝혔다. VDR 자료와 CCTV 영상에는 용호부두에 계류된 요트 3대를 충격한 1차 사고에 이어 광안대교를 들이받기까지 선장 S(47·구속) 씨와 승무원이 혼란에 빠져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선장은 지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우왕좌왕했다.

특히 선장의 음주 운항 정황도 드러났다. 사고 당일 광안대교와 충돌한 이후인 오후 6시4분 조타실 선원은 “이게 술의 결과다. 들어갈 때(입항)뿐만 아니라 절대로 안 돼. 아예 배에서는 안 되지”라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다. “선장 (배) 못 돌린다. 선장 ○○됐다”는 선원들의 말도 녹음됐다. 해경은 이를 바탕으로 선장이 음주 상태에서 배를 운항했다고 판단했다. 해경은 “출항 당시 선장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부두에서 흥분해서 고성을 지르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 증언도 확보했다.

해경은 사고 이후 씨그랜드호를 조사하면서 선내에 330㎖ 맥주 캔 여러 개와 3분의 2가량이 빈 500㎖ 코냑 한 병도 발견했다. 당시 씨그랜드호 승선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음주 측정에서 선장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86%였다. 다른 승선원의 음주는 감지되지 않았다.

부산해경 윤성기 수사과장은 “용호부두에서 배가 돌아나갈 수 있는 선회각도가 확보되지 않으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선수를 원양 방면으로 맞춰야 한다. 하지만 선장이 술을 마신 상태라 배를 몰 수 있는 판단력이 흐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배를 돌리려다 보니 회전 반경이 커져 광안대교를 들이받았다는 게 해경의 설명이다.

선장은 지난 3일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전 취재진을 만나 “광안대교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난 후 닻을 내린 상태에서 술을 마셨다. 스트레스로 심장이 아팠는데 코냑이 혈액순환에 좋다고 해서 그랬다. 모든 선원이 이를 봤고 증명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고 시점 전후의 대화 내용이 이날 공개되면서 선장의 거짓말이 탄로났다. 선장은 음주 운항에 따른 해사안전법 위반 등 혐의로 지난 3일 구속됐다.

선장은 또 사고 전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고, 일등항해사의 “배를 못 돌린다”는 권고도 듣지 않은 채 배를 선회하라고 지시해 사고를 유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선장은 조사 과정에서 “일등항해사보다 내가 능력이 뛰어나다. 그의 말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해경은 전했다. 승선 경력 19년 차인 이 선장은 지난해 다른 선박을 몰고 용호부두에 입항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지열 기자 heat8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