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미술품이 무단으로 철거되거나 분실된 사례가 잇따른다. 관할 기초자치단체는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지만 강제성과 처벌 조항이 없어 이를 지키지 않거나 뒤늦게 복구해도 아무런 처벌이 없어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6일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 상가동 건물 앞에 공공미술품 ‘부산무한선’이 설치돼 있다. 이 조형물은 상가 관리업체가 무단으로 철거했다가 4개월 만에 원상복구됐다. 이원준 기자

26일 부산 해운대구에 따르면 엘시티 상가동 앞에 설치됐던 조형물 ‘부산무한선’이 지난 7월 철거됐다가 최근 원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이 조형물은 상가 점주 등 건축주의 동의를 얻어야 철거할 수 있지만, 상가 관리업체가 무단으로 철거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관리업체는 해풍으로 인해 조형물이 녹슬어 이를 옮겼다고 주장했지만, 보수 계획서를 제출하지 못하는 등 철거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구가 원상회복 명령을 내려 조형물은 최근 예전 설치 장소에 복구됐다. 작품은 4개월가량 엘시티 지하주차장에 덮인 채 방치됐다. 구는 관리업체에 훼손 여부 등 원상복구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으며, 시 미술작품심의위원회를 거쳐 실제 원상복구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연제구 한 빌딩 앞에 설치됐다가 분실된 공공미술품 ‘역사의 문’. 연제구 제공

이처럼 미술품이 없어진 채 장기간 방치한 곳이 부산 곳곳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북구의 한 대형마트 지하 2층 벽면에 걸렸던 회화 2점도 사라졌다. 이 작품들은 2001년 설치됐으나 2022년 8월 내부 공사 중 분실됐다. 마트 측은 비슷한 작품을 설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2년 넘도록 여전히 원상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연제구 한 빌딩의 조형물도 소유주 변경 후 리모델링 과정에서 사라졌다. 이에 구가 지난해 11월 원상회복을 요청했으나 아직 이행되지 않았다. 1996년 설치된 이 조형물은 높이 약 2ｍ의 청동 조각으로, 분실 시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르면 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 등은 회화·조각·벽화 또는 건축물 미술작품으로 인정할 만한 공공조형물을 설치해야 한다. 건축물 미술작품 설치 비용은 건축 비용의 1% 이내 범위에서 정해야 한다.

하지만 미술품이 사라진 뒤 원상회복이 되지 않아도 이를 처벌할 규정이 없다. 구가 관련법과 시 조례 등에 따라 원상회복 조치를 명할 수 있으나, 소유주 등 철거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처벌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다.

공공미술품 관리감독 업무를 맡은 기초지자체들은 단체는 법의 사각지대 문제를 토로한다. 해운대구 관계자는 “과태료 부과나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구에서 이를 강제할 권한도 없다”며 “공문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원상복구를 명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경성대 강석점(법학과) 교수는 “현행법상 문화유산을 반출·훼손하는 행위 등은 행정대집행 후 원상회복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며 “문화시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서라도 공공미술품 역시 이에 준하는 제도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