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30만 중국 소수민족 전락
‘강(羌)’은 양치는 사람을 형상화한 글자로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한다. 초기 갑골문은 글자 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종족 이름으로 조자(造字)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역사 전(前) 무대에서부터 간단치 않은 역할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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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족 마을 입구에는 신양(神羊)상이 세워져 있다. 본래 유목민인 강족은 신양을 토템으로 삼았다. |
강족은 본디 자신들을 ‘르마(日瑪)’ ‘루마(如瑪)’ ‘얼마(爾瑪)’ 등으로 자칭하는, 말과 가까운 유목 민족이었다. 그들의 주 터전은 간쑤(감숙)성 서쪽과 칭하이(청해)성 동쪽의 고원지대로 농경에는 불리한 환경이었기에 목축을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만, 태생부터 용맹한 전투적 기질이 있었던 듯하다. 그들을 ‘강’이라 부른 것은 다른 민족들로, ‘서융(西戎)의 목양인(牧羊人)’이라는 뜻이니, 말을 타고 양몰이를 하는 전형적인 유목족에 대한 두려움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시경’에 ‘성탕(成湯) 시절에 저강(氐羌)이 감히 조공(享)을 보내지 않거나 왕을 알현하러 오지 않는 일이 없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공’은 후대에 나온 상투적인 표현이고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상이 잦은 천도 등으로 안정되지 않자 교류가 끊어졌던 모양이고, 강족은 노예로, 제물로 바쳐지기까지 하는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강족의 수난은 상나라 대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후한서(後漢書)’ 등의 사서도 하·상·주를 이어 진(秦)·한(漢)대까지 중원세력에 복종하면서도 수시로 저항해 박해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유목이 생업이니 초목이 시들면 곡물 확보를 위해 중원을 침탈하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었지만, 저항의 끈질김과 사나움이 타고난 전투력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서융으로 불린 세력의 다수는 중원과의 마찰, 자체의 이합집산을 겪으며 점점 서쪽으로 밀려가 오늘날 중앙아시아, 심지어 서유럽의 종족 형성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며 원래의 이름을 잃었다. 그러나 강족은 티베트 장(藏)족을 비롯한 소수민족과 교류하며 4000년 이상의 모진 세월을 견뎌내 오늘도 중국 땅에서 그 이름을 지켜내고 있다. 다만 태생의 야성을 잃어버린 채 이제는 불과 30만여 명에 불과한 명색만의 소수민족으로, 더구나 2008년 쓰촨(사천)성을 덮친 대지진의 진앙지가 하필 강족자치구가 있는 원촨(汶川)이어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더욱 비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