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다. 땅이 넓어 곳곳에 군웅이 할거하기도 했지만, 북쪽 국경 너머의 전투력 강한 이민족이 상존한 까닭이다. 그로인해 중화라는 이름으로 아우른 주류세력과 오랑캐라 멸시한 이민족이 번갈아 왕조의 주역이 되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적대적 감정이 깊은 데다 거칠기까지 한 이민족 세력은 왕조의 주인이 되고나면 이내 피지배 민족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정권을 빼앗겼다. 그뿐 아니라 어느새 다수는 흐물흐물 중화족에 합류되어 재기의 기반마저 허물어져있는 것이었다. 여러 이민족 왕조가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정권을 되찾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 생생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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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주 시대 화폐의 일종인 천연패(사진 위)와 유리하 연 유지의 화려한 칠기 유물들. |
사가(史家)들은 말한다. 중국의 공고한 지배구조는 거대한 영토 지배에 반드시 필요하고 그 운용을 위해서는 익숙한 관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자를 비롯한 탁월한 문화는 오랑캐 이민족이 스스로 감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민족은 대부분 소수였다. 전쟁에서는 탁월한 전투력의 소수가 승리할 수 있지만 그 무력만으로 전체를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등등.
‘장독문화’라는 말이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장독은 콩이 장(醬)으로 변하듯 무엇이든 담기면 배척하지 않고 더불어 숙성해 새로운 문화로 탄생한다는 뜻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이라는 장독에서 대승불교를 꽃피운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배척하지 않는 포용의 가장 큰 마당은 시장이다. 문화는 특정 지배세력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씨앗을 뿌리기도 하지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언제나 다수의 민중이고, 확산되어야 문화라는 꽃으로 피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염업(鹽業)과 같이 국가재정 확보를 위한 일부 독점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상업은 통제받지 않아 무엇이든 쓸어 담고 내놓을 수 있었다. 지배세력이 된 이민족을 동화시키고 서역의 상인들까지 줄을 이어 찾게 만든 원천이었다.
한반도에도 그런 왕조가 수백 년 영화의 역사를 누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해괴한 논리로 무장한 왕조는 기어이 나라를 결단내지 않았던가. 오늘도 여전히 국유든 무엇이든 시장의 자유는 활성화된 중국은 다시 위세를 휘두른다. 제국의 부활인가, 걱정되고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