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후보다 백성이 먼저
- 분봉제에 얽매인 제후국 왕들
- 패권 장악 커녕 현상유지 급급
- 비위 상한 선왕 ‘친민’정책 추진
# 내치 이어 외정 나서지만
- 변방 괴롭히는 험윤 정벌 성공
- 형초·회이 굴복에 승리 취하나
- 융 정벌 실패하자 왕 권위 급락
# 철기문화 꽃피우다
- 청동무기가 강한 철병기로 대체
- 수레 등 농기구로도 생산됐지만
- 땔감 급증으로 자연은 점차 황폐
선왕(宣王) 정(靜)이 태자 시절 소목공의 집에서 숨어 지낸 것은 앞서 보았다. 아버지의 실정과 백성의 폭동, 소목공(召穆公) 주정공(周定公)에 의한 공화정치 등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테니 아무리 문제 있는 핏줄이라도 어찌 근신하는 마음으로 선정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화의 두 주역을 재상으로 삼아 그들의 보좌를 받으며 윤길보(尹吉甫) 중산보(仲山甫) 등의 현신을 발탁하고, 문왕 무왕 성왕 강왕의 정치를 본받겠노라 선포했다. 제후들은 다시 왕실을 섬기기 시작했고 노 무공(魯武公)이 찾아와 조현(朝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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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정을 일삼다가 백성에 의해 쫓겨난 아버지로 인해 신하였던 소목공의 집에서 숨어 지냈던 선왕은 각종 규제를 풀고 변방의 오랑캐 처단에 나서는 등 서주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룬다. 중흥기를 맞은 주나라 선왕 시대의 풍경을 새긴 화상석(왼쪽 사진)과 철기 농경 화상석. |
■분봉제의 그물에 걸려있는 제후국
노나라는 주공 단이 분봉 받은 제후국으로 일찍부터 강성했다. 아마 공화정치 체제에서 더욱 힘을 키우며 왕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제후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주인조차 없는 왕실에 굳이 성의를 다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왜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고 눈치만 살피다가, 도덕적 정당성을 충분히 폄훼할 수 있는 선왕의 등장과 겨우 선대 훌륭한 왕들의 정치를 본받겠노라 선포했다는 명분으로 조현한 것일까?
‘천자’가 하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여왕 한 사람의 분탕질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 바이다. 누구라도 나서서 천자의 역할을 대신하려면 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사실 하를 멸한 상의 탕왕이나, 상을 멸한 주의 무왕이나 비슷한 명분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서주의 제후 왕들은 모두 주공 단이 짜놓은 조밀한 그물에 걸려 있었다. 혼자서 깃발을 들고 일어나 패권 장악에 나서기에는 각자의 힘이 너무도 미약했다. 일백이 넘도록 쪼개고 나누어놓은 분봉제. 결국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뿐 현상을 유지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현상이 흔들리면 처음부터 판을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르고, 이미 왕을 쫓아낸 자신들의 위력을 확인한 평민 세력이라도 끼어들면 밥그릇 자체가 깨지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때마침 거치적거리는 존재에 불과했던 여왕이 죽었다. 이제 그야말로 모두가 납득하고, 아니 동의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14년 동안 유지된 공화정치를 뒷받침한 명분도 기실 말장난이었다. 한 하늘에 두개의 해가 있을 수 없듯, 도망친 왕이지만 왕은 왕이라는 논리 말이다. 이제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다급했다. 해가 졌으니 캄캄한 어둠인데 그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지만 가장 두려운 세력은 평민일 수 있었다. 우선 그들에게 천자라는 해를 밝혀주어야 했다.
기록은 여왕의 죽음과 선왕의 즉위를 함께 거론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 즉위했다. 길지는 않아도 천자의 자리가 완전히 빈 여백이 있었으니 물밑이 요란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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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왕의 제후 조현도. |
■중흥을 위한 외정의 성공과 실패
어쨌거나 선왕은 즉위했다. 제후들은 그를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평민을 억누르고 서로를 견제하며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타협으로 천자라는 권위를 옹립하고 묵인했을 뿐. 그렇지만 선왕의 입장은 달랐다.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이지만 조금이라도 현명한 자라면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괵 문공이 적전(籍田)을 돌보지 않는 일을 지적하여 간했지만 선왕은 듣지 않고 오히려 ‘부적천무(不籍千畝)’를 선포했다. 적전은 천자나 제후가 친히 백성을 거느리고 경작하여 그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던 제전(祭田)을 말하는데, 천자는 1000무(千畝 : 오늘날 1무는 대략 200평이다) 제후는 100무를 경작하는 왕실의 중요한 의례였다. 그런데 봄날, 밭가는 철이면 이전의 천자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친히 밭에 나가 적전례(籍田禮)를 거행하고 경작의 모범을 보였는데 선왕은 오히려 이의 폐지를 선언한 것이다. 산천과 호수의 규제를 완화해 백성의 삶을 편히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면종복배의 기미가 엿보이는 제후들보다 백성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정치를 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내치만으로 실추된 천자의 위엄을 전부 회복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선왕은 외정을 결심한다.
선왕은 먼저 의왕 이래로 지속적으로 변방을 괴롭히는 험윤의 정벌을 명했다. 윤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크게 승리하니 험윤은 북방 멀리로 도망쳤다. 이에 놀란 융적의 부족들은 신하의 예로 주나라를 섬기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방숙(方叔)에게 군사를 주어 남쪽 형초(荊楚)의 정벌을 명하니 승리를 거두었다. 윤길보도 다시 회이(淮夷)를 굴복시켜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진중(秦仲)에게 서융의 정벌을 명했는데 그가 전투에서 죽자 선왕은 그의 아들 다섯에게 군사 7000명을 내주고 다시 정벌을 명하니 크게 승리했다. 이른바 ‘선왕중흥’의 치적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패하니 주 왕실의 힘은 점점 기울어갔다.
선왕 39년, 강씨(姜氏)의 융 정벌에 나섰지만 천무(千畝 : 산서성 개휴(介休)현 남쪽)에서 크게 패했다. 이때 정벌에 나섰던 남국(南國 : 장강과 한수 사이) 군사를 모두 잃은 선왕은 징병을 위한 인구조사를 명했다. 중산보는 불가하다 간했지만 선왕은 강행했다. 기울어가는 왕실의 힘과 위엄을 회복해보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다. 아니, 이미 권위를 회복할 수 없는 천자와 제후 왕들이 엇박자를 내는 상황이었으리라.
선왕 46년, 왕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궁생이 즉위했다. 그가 유왕(幽王)이다.
■열리는 철기시대
주나라가 세워지고 어느 새 26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상나라 말기에 이미 운철(隕鐵)로 문을 열기 시작한 철기는 이제 청동기를 대체하여 시대의 주역이 되고 있었다. 먼저는 지금까지 없었던 강력한 병기로 대체했으니 전쟁의 주역이고, 수레와 바퀴의 들보가 되고 농기구로 생산되었으니 산업과 농경의 주역이기도 했다.
청동은 철기에 비해 무른데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 과정을 거쳐야 하고 두 가지 광석을 캐고 수송해야 하니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동보다 강한 철기는 제련 과정만 거치면 되는데다 원광석도 풍부해 빠르게 퍼져갔다. 특히 이제까지의 목제 농기구를 대체하며 주된 산업인 농경의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리니 인구의 증가까지 가져왔다.
나라의 근본은 먼저 사람이다. 작은 봉지라 해도 인구가 적어 내버려둔 땅이 많았는데 사람이 늘어 경작지로 넓어지니 자연스레 국력이 커져갔다. 철로 만든 강한 병기도 등장했다. 게다가 신성불가침의 절대 권력 1인 천자는 세월을 따라 늙고 병들 듯 유약함과 일탈을 보이더니 백성에 의해 쫓겨나기까지 했다. 군주이고 영웅이라면 패권을 꿈꿀 만하지만 여전히 명분이 문제였다. 때를 기다리는 시대, 그렇게 전쟁의 기운은 땅 밑에서부터 지표면을 달구고 있었다.
철의 등장은 인류문명 발전의 획기적 단초였다. 그러나 철의 제련에는 엄청난 열이 필요했다. 아직 석탄에는 눈을 뜨지 못했으니 숯이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원이었다. 코끼리와 호랑이가 살던 대평원의 밀림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는 베어져 숯으로, 그 땅은 농경지로, 늘어나는 인구만큼 주거지로, 교통수단이 발달하니 길을 내기 위해…. 그렇게 인간이 자연을 습격하며 슬슬 기후의 반격도 준비되고 있었다. 하늘을 읽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천자도 자연의 반격은 미처 상상조차 못했을 테니, 농경족의 한계라 해야 하나 모르겠다.
◆왕실·제후가 먹던 ‘산동요리’…재료 본연의 맛 살린 ‘회양요리’
- 산동은 눈으로 보는 맛 강조하고 회양은 조미료·색소 일절 안넣어
- 中 4대 요리로 미식가들 ‘엄지척’
‘회이’ ‘회하(淮河 : 화이허)유역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회수(淮水)라고도 불렸던 회하는 하남성 서남부 남양(南陽)시 인근에서 발원해 동남으로 하남, 안휘, 강소성을 흘러 장강과 합류한다. 길이는 약 1078㎞로 장강, 황하와 함께 중국 3대하(三大河)에 포함된다. 전통의 사서 ‘사기’에 버젓이 ‘회이’라고 기록했으니 그들 지역 일부, 특히 회하 남쪽은 서주 말까지 여전히 권역이 아니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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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동요리는 중국 4대 요리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베이징덕’으로 불리는 진흙오리구이도 산동요리에 기원을 두고 있다. 베이징 ‘전취덕’ 오리구이점(왼쪽)과 쏘가리찜요리. |
아무튼 회하유역은 수량이 풍부한데다 땅이 비옥해 고대로부터 인류의 터전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사람이 살고 물산이 풍부했으니 나름의 문화가 형성되었을 터, ‘화이차이(淮菜)’도 그중의 하나이다.
중국인에게 요리를 꼽으라면 대부분 ‘루차이(魯蔡 : 산동요리)’ ‘화이차이(회양요리)’를 먼저 말한다. ‘루(魯)’는 주공 단이 분봉된 ‘노’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동성의 자동차 번호판도 ‘노’를 앞세운다. 그런 산동성의 요리가 4대 요리의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예로부터 왕실과 가까운 제후국이 많아 그만큼 최고의 요리도 발달했기 때문이다.
산동요리는 흔히 말하는 베이징요리의 원형이기도 한 셈인데 ‘베이징덕’ ‘베이징카오야’로 불리는 오리구이도 산동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요리 대부분이 그렇듯 대평원과 바다를 면한 산동요리도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을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는 짠맛이 특징인데 이는 평원의 무더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바다와 가까운 지역의 해산물 요리는 담백함으로 재료의 풍미를 살린다. 특별히 선명한 색조와 정교한 배열로 안미(眼味 : 눈으로 보는 맛)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공자 사당이 있는 곡부(曲阜) 지역의 제례(祭禮)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미식가가 손꼽는 최고의 요리는 아무래도 후이차이, 회양요리다. 회하와 장강의 다양한 수산물과 강 유역의 다양한 식재료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데 중점을 두고 조미료나 색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달거나 맵지 않은 담백함에다 전통의 식초를 사용하여 어떤 종류의 음식도 느끼함으로 질리지 않게 한다. 대표적으로 돼지고기를 잘게 다진 미트볼 요리 ‘사자두(獅子頭)’가 있고, 쏘가리를 맑게 찐 ‘청증계어(淸蒸桂魚)’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