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일 속 위대한 업적들 기려야
보았지만 여난(女難)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여성을 내내 반복된 음란과 방탕, 마침내는 망국의 원인으로 매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사실은 권력으로 너무 많은 비(妃), 부인, 첩을 두었던 남성의 끝없는 욕망이 문제였다,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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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
비단 중국 역사에서의 일만도 아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동서를 막론하고 성은 노골적이고 탐욕스러웠으며 억압의 배경이 있었다.
또한 그 원초적 욕망이 이성으로 순화되는 것을 문명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점은 서양은 신화, 문학, 미술 등으로 성에 대한 많은 기록을, 시정(市井)의 매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남겼다. 과연 중국에서는 권력자의 성만 문란했던 것일까.
중국에도 정나라 시(詩)의 음란함을 비난하는 따위의 기록이 있다. 당시의 시는 요즘 유행가 가사와 비슷했으니 시대상을 알기에는 맞춤하다. 그런데 음란하다 해봐야 ‘그대 날 사랑하고 생각해 주신다면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겠어요’ 하는 정도이다. 물을 건너기 위해 ‘치마를 걷는’ 정도가 무슨 그리 대수라고. 통일제국 진(秦) 이후에는 청루(靑樓), 기녀(妓女) 등의 글귀도 보인다. 성의 매매가 수반되었음이 엿보이는데 굳이 가무, 풍류를 덧씌운 것이다.
회화에서도 여성의 속살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었다. 존중하고 아껴 보호하려는 뜻이었을까? 남성의 문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치열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논쟁이 있고 난 뒤 유가(儒家)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여성은 황실과 같은 일부 권력 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둔의 세상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뒤늦게 찾아낸 상나라 여장군 ‘부호(婦好)’나 영화 ‘뮬란(木蘭)’의 그녀에서 알 수 있듯 기록을 지우고 묵살했던 것이다. 어찌 그녀들뿐이겠는가. 심지어는 근세 청나라 이후 나라와 민중을 위해 치열했고, 그 기록이 버젓함에도 지금껏 외면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기록하지 않아 은둔이 되었을 뿐 삶 곳곳에서 맹렬했던 그 여인들이 이제 베일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여전히 구분의 그림자는 짙지만 다시 가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어느 곳의 여성보다 서러웠지만 강인한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손잡아야 할 파트너이자 ‘펑요우(朋友:친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