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세계에서 천적관계는 묘하다. 비슷한 기량을 갖고 있는데도 특정한 상대에게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맥을 추지 못하는 현상을 보인다.
최근 이러한 천적관계의 미묘함을 보여주는 바둑이 있었다. KB국민은행 한국리그에서 영남일보의 이희성 6단은 천적인 파크랜드의 김주호 7단에게 후반, 착각으로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 바둑의 승리로 김주호 7단은 이희성 6단에게 총 6연승을 기록했다.
또한 한국리그 3위를 놓고 경합을 벌인 일전에서 월드메르디앙의 김만수 6단이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하던 신성건설의 김승준 9단을 꺾었다. 알고 보니 김만수는 김승준의 절대 천적. 이 바둑을 포함하여 김승준은 김만수에게 7연속 패배를 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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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도 |
(1도) 김만수·김승준의 실전. 초반의 흐름은 백번인 김승준 9단이 우변 중앙의 흑돌을 공격하며 대세를 주도하는 듯했다. 이 흑을 몰면서 우변과 상변에 영토를 굳히면 백이 유망해 보이는 국면.
그러나 이후의 접전에서 우변 백진은 보잘 것 없는 모양으로 축소되고 중앙에서 흑이 떵떵거리는 상황으로 돌변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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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도 |
(2도) 김만수 6단은 흑39의 건너붙임으로 백돌을 차단했다. 흑49까지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중앙의 미생마를 보강하려는 전략. 흑55까지 모양을 잡을 때 백56으로 실리를 취하여 그런 정도의 진행으로 보이는 결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김만수 6단은 확신에 찬 손길로 흑57에 끊는다. 평소에 매우 조심스런 기풍으로 알려진 김 6단이지만 이 바둑에서는 과감한 끊음수를 거침없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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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도 |
(3도) 김승준 9단은 백58에 뻗어 일전불사를 외쳤으나 흑59에서 67까지 중앙 흑 두점이 포위당하며 일거에 제공권을 잃고 말았다. 흑69까지 흑 우세.
백이 흑돌을 잡으려고 백60·62로 두 수를 투입했는데도 흑을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다. 김승준이 천적 김만수의 미끼에 걸려 일거에 대세를 그르친 장면.
이 바둑에서 두 기사는 평소와는 다른 행태를 보여주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김만수 6단은 자신감이 넘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인 반면, 미소띤 얼굴로 호쾌하고 시원스런 기풍을 보여주던 김승준 9단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처럼 특정한 상대에게 맥을 추지 못하는 일은 바둑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주요한 이유는 기풍의 상대성과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