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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헤드린 법정의 모습. |
금이 가 물이 새는 항아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하인들이 물을 길러 갈 때마다 주인은 굳이 그 항아리를 가져가게 했다. 귀한 물을 줄줄 새고 다니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용해 주는 주인이 고맙기도 해서 어느 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왜 저같이 쓸모없는 깨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해 주시나요?" 주인이 대답했다. "얘야, 네가 그동안 걸어 왔던 길을 돌아봐라." 깨진 항아리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쁜 들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주인이 말했다. "네가 그동안 흘려 준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난 너를 물을 길어 오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단다. 난 네가 흘리는 물로 이 꽃들을 키우려고 너를 보냈던 거란다."
의도를 알면 감동이 온다. 진심을 알면 은혜가 된다. 오늘 다루려는 성경 속 인물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며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 성경은 이 사람을 부자라고 소개한다(신약성경 마태복음 27장57절). 성경은 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라고 소개한다. 오늘날 국회의원과 같은 자리다. 그는 재력과 권력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이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의롭기까지 한 것이 쉽지 않은 세상사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러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그동안 자신을 드러내놓고 예수의 제자라고 밝히질 못했다. 당시 시대적 정황으로 볼 때,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는 늘 이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랬던 그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총독 빌라도를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의 장사를 치르겠으니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 일은 작게는 주류 사회에서 완전히 왕따 당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산헤드린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해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받아 자기 가족들이 쓰려고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것이다.
그렇다. 잘 나갈 때 나서는 사람은 꼭 있다. 그러다 상황이 안 좋아진다 싶으면 뒤로 숨는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 봐라. 그럴 줄 알았다. 누구누구가 책임져야 한다." 예수님의 재정담당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그런 경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된 상황을 보고 예수님을 은 30냥에 넘기고 만다. 역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모두가 이렇게 숨어버릴 때,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숨어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낸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이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장례를 맡아서 치른 것이다. 왜 그런 결단을 한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진실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잘나서 그런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그 자리에 앉혀 놓으셨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의도를 알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료해진다. 얼마나 위험한가, 얼마나 손해를 볼까는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도가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것을 자신의 비전과 사명으로 품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올인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대연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