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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모크' 포스터. |
지난 주 이 코너를 통해 올해 시상식 영화제들을 일별하면서 한 해의 밑그림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한 해의 시상식이 대중적인 의미의 결산이 될 수는 있어도 영화예술의 새로운 변화를 가늠해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박스오피스 성적과는 무관하게, 아니 박스오피스를 넘어서서 영화라는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라는 본질론적인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유명한 신화 중의 하나가 이타카로 귀향하는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다. 신화에 따르면, 세이렌의 노래는 너무나 강렬한 유혹이어서 노래를 듣는 뱃사람들을 바다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노래소리는 '나가수'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감동이었고,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자신이 속한 상황과 위치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뱃사람들은 노래소리에 끌려 손에 잡은 그물을 던져두고 노래가 들려오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노래뿐만 아니라 '세이렌'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할 수가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예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요컨대 동물에 불과한 세이렌이 인간과 똑같이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노래는 아주 기이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부르는 모든 노래도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고 말한다. 흔히, 천상의 목소리나 신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저 가인들의 노래소리는 이따금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지 않는가. 블랑쇼의 말은 세이렌이라는 존재는 원래 노래라는 것의 절정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 버린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이 일화를 기록하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이야기야말로 애초에는 노랫말과 가락이었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의 첫 머리에 세이렌의 노래를 기록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을 기록한 '일리아드'와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다룬 '오디세이아'를 통해 호메로스야말로 세상의 세이렌이 되고 싶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일리아드'는 신도 속일만한 지혜를 지닌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기만'을 기지로 통과하고, 결국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무수한 전설이 남긴 것은 세이렌의 강력한 노래로 인해 죽음을 맛본 이들의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진짜 기만을 부린 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호메로스이며, '일리아드' 전체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세이렌이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는 자신의 노래인 '일리아드'를 통해 독자를 기만하고, 멋지게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로 빨려들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독자들은 오디세우스의 무사통과에 안심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호메로스의 입담 좋은 기만에 빠져드는, 텍스트의 바다로 빠져드는 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모름지기 좋은 영화예술이나 좋은 이야기란 이와 같다. 독자가 속지 않고 있다고 믿는 순간 속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 좋은 기만, 즉 예술이 허구를 통해 표현하는 기만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술적 기만이라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순간들을 웨인 왕이 연출하고, 폴 오스터가 쓴 '스모크'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소설가 폴 벤자민은 담배가게 주인 오기로부터 크리스마스용 단편소설 이야기의 사연을 들은 뒤 "당신이야말로 예술가다!"라는 상찬을 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하는 오기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린다.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기만, 진짜 예술이 꽃피는 순간이다. 속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면서 속일 수 있는 그 순간. 바로, 예술적 모멘트!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