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은 여성의 미모를 가꾸는' 化粧'과 시신을 불에 태우는 '火葬'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영화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두 가지 다른 세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의 노화와 아내의 죽음, 젊은 여직원의 아름다운 육체가 한 측면을 이룬다. 야위어가는 아내의 몸과 배에 접힌 주름,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해 소변 주머니를 몸에 착용해야 하는 수고까지. 세밀한 관찰을 통해 보여지는 몸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에 반해 여직원의 싱그러움은 주인공에게 삶의 활력과 욕망, 꿈을 제공한다. 손에 잡힐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욕망은 또 다른 측면을 만들어간다. 주인공의 꿈이나 환상을 통해 그를 유혹하거나 거부하는 여인의 몸짓은 아내의 육체와 대조를 이루면서 관능성이라는 관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상한 것은 두 측면이 충돌할 때 연상되는 날카로운 면을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층위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두 세계는 서로 넘나드는 것임을 드러낼 뿐 구분하거나 배척 지점을 만들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내의 상여를 따라가는 장례 행렬이다. 관 속, 곱게 치장한 아내의 시신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온하다. 행렬의 틈에서 주인공이 뒤를 돌아보는데, 검은 옷의 인물들 속에 빨간 옷을 입은 여직원이 따라온다. 주인공은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차마 행렬을 거슬러 나아갈 수 없다. 이 장면은 주인공의 꿈이지만 아내의 죽음과 이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앞으로 주인공을 둘러싼 두 여인의 위치와 자신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시선과 감정에 따라 사건을 배치하며 '그'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그는 능력 있는 대기업 임원이고,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좋은 상사이며, 아픈 아내를 정성껏 간호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는 삶의 추동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처럼 등장하며 오히려 아내보다 오래전에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 장면인 여직원이 주인공을 찾으러 오는 씬을 살펴보면, 실현될지 모를 욕망의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질 치던 그가 휘적거리면서 산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삶의 공허함, 욕망의 허무함, 사랑과 그리움, 죄의식이 뒤엉켜 그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뒤이어 아내가 사랑하던 개를 안락사 시키려고 병원에 간 그는 문을 열고 나와 한참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지만, 처음에 등장한 꿈의 액자식 구성과 병원의 유리문은 관을 연상시킨다. 아내의 주검이 놓인 관은 입관과 화장으로 이어지고, 병원의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세상은 투명한 관처럼 보인다. 개의 죽음과 마주하며 죽음의 물리적인 과정을 겪은 그에게 남겨진 삶 또한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예측할 수 있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노쇠함과 소멸, 죽음과 삶의 비밀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감독의 혜안에 감사할 따름이다.
박인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