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기도 하지만 배우의 생동하는 기운이 스크린에 맺히는 예술이다. 무성영화 시기에는 배우들의 몸짓이 목소리를 대신했으며 표정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중요한 미학적 변화를 일으켰다.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으로 삶에 잠재한 이별과 죽음, 늙어감과 욕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섬세한 감정의 층을 연기한 배우 안성기의 얼굴 때문에 가능하다.

아역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안성기의 연기 노정은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를 제외한 한국영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가졌거나 특정한 감독의 페르소나에 국한된 연기자가 아닌, 한국영화계의 시대적 분기점에 등장한 다양한 감독의 영화에서 폭넓은 역할을 맡았다. 배창호 감독과 '고래사냥'(198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등에 휴머니즘을 새겨 넣었고,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의 사회적 자화상에 해당되는 당대 남성의 얼굴을 연기했으며(박광수의 '칠수와 만수', 장선우의 '성공시대', 이명세의 '개그맨', 정지영의 '남부군'),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취화선'(2002) 등을 통해 질곡의 한국사와 변해가는 사회 모습을 육화시켰다.

특히 '화장'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보살피는 의무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삭막함과 젊은 직원을 응시함으로써 추동되는 정념의 상태를 은밀한 시선으로 구체화한다. 아내의 병간호와 전립선비대증이라는 지병으로 고통받고 회사의 과중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그는 표정없는 얼굴이며 일상과 죽음, 병의 상태를 체념한 공허한 얼굴이 된다. 영화에서 유독 무언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안성기의 얼굴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삶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불쑥 찾아오는 살아감의 활력에 대한 갈망이 교차할 때 두드러진다. 병실에서 잠든 아내의 곁에서 쪽잠을 자거나 창가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나 여직원이 찾아왔을 때 비척거리면서 걷는 그의 걸음걸이, 아내의 임종 후 언뜻 비치는 회한과 해방감이 교묘하게 공존하는 표정은 이 영화의 표면 아래 도사린 인간의 민얼굴을 드러낸다.

배우 안성기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한국영화가 걸어온 궤적과 세월의 흔적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원세·1981)의 묵묵한 장남의 무표정, '만다라'(임권택·1981)의 금욕과 번민을 동시에 품은 차가움, '안개 마을'(임권택·1982)의 비밀과 숨죽인 음습함을 거쳐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1999)의 과묵한 킬러, '라디오 스타'(이준익·2006)의 사람 좋은 매니저, '부러진 화살'(정지영·2011)의 타협을 원치 않는 완고한 교수의 얼굴로 변해갔다.

그새 주름도 늘고 환한 웃음의 표정도 달라졌지만, 그의 얼굴이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흔적은 안성기의 시간이자 한국영화사의 길 그 자체가 되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