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정창섭 개인전 'meditation'(묵고). 조현화랑 제공

- 한지 원료 '닥' 작품 주재료 사용
- 미니멀리즘과 비교 세계적 조명

갤러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도무지 벽에 걸린 것들이 벽지인지 작품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제목도 뒤에 붙은 숫자만 다를 뿐 똑같다. 작품 해설을 읽어도,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어도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천문학적인 작품 가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작품을 돈으로 환산해서 보는 것은 실례 중의 실례. 대신 왜 그 정도 가격이 책정됐는지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그 작품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정창섭 작가.

앞의 설명에 딱 들어맞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다음 달 30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조현화랑에서 열리는 정창섭 개인전 'meditation'(묵고)이다. 정창섭 작가는 한국 현대 미술 1세대 화가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2011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국내 전시가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는 평생 단색을 추구한 정 작가의 작품 세계와 최근 미술계에 몰아친 단색화 열풍이 만나면서 빛을 냈다. 특히 지난 6월 프랑스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세계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래서 생전 세 차례나 개인전을 열었던 조현화랑이 사후 4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 전시를 하게 됐다.

그러면 왜 그의 작품이 사후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을까.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정 작가는 한지의 원료인 '닥'을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했다. 한지보다 두껍고 거친 닥을 물에 넣고 불린 뒤 캔버스 위에 붙여놓고 엄지손가락으로 하염없이 누른다. 닥이 완전히 힘을 상실했을 때까지다. 그래야 닥이 가지는 그 자체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또 닥을 물에 불린 시간에 따라 명도와 채도가 변화하는 모습까지 탐구했다. 그의 작업 과정은 그 자체로 전시와 작품의 제목인 묵고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의 작품은 닥의 고유한 생명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물론 작가 자신의 끊임없는 묵고까지 덧붙여서. 이제 벽에 걸린 그의 작품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많이 비교된다. 미니멀리즘은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사물의 핵심만 표현한다. 작품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 작가의 작품에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가 없다. 오직 작가의 묵고와 우리의 전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단지 울퉁불퉁한 표면이 작가의 체온을 전해준다. 이런 요소로 말미암아 외국 평론가들은 정 작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정 작가의 작품은 오는 10월부터 이우환, 이응노 등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와 함께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에서 전시돼 또 한 번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다음 달 30일까지(월요일 휴관) 부산 해운대구 조현화랑. (051)747-8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