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국은 탐욕과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사진은 로마 시대 콜로세움 경기장.

- 고대 로마시대부터
- 현대 美 패권주의까지
- 정복과 폭력에 정당성 부여한 역사

- 구시대적 관념 버리고
- 인종·이념서 탈피해
- 다양성의 사회 지향을

"국민국가의 힘은 결코 군사력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기술적 자원과 기민한 외교정책 수행과 선견지명, 결단력 그리고 능률적인 사회적·정치적 조직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와 국민, 그들의 기량·활력·야심·기강·자발성 그리고 신념과 신화와 환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게다가 국력은 그 자체만의 절대적 범위 안에서만 고려될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의무나 제국주의적 의무에 대한 상대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의 상대적 차원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코렐리 바네트(Correlli Barnett)의 '영국의 붕괴(The Collapse of British Power)'에서

■제국의 속성은 무엇인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석상

1494년 6월 7일,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 국왕 페르난도 2세(1452~1516)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1451~1504), 그리고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1455~1495)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를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 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국 사이에서 아메리카 땅의 새로운 경계선을 카보베르데(Cabo Verde) 제도의 서쪽으로 370레그아(league=약 5km) 떨어진 지역에 남북으로 선을 긋고 선의 서쪽은 에스파냐에, 선의 동쪽은 포르투갈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약은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한 즉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 즉 아메리카와 그 서쪽 모두가 에스파냐 영토임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에스파냐는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서쪽의 영토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였고, 피사로를 비롯한 정복자들에게 정복과 약탈, 착취의 권리를 위임했다. 그리고 교황이 조약의 내용을 인정해줌으로써 정복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할 정당한 권리를 신의 이름으로 부여해준 셈이 되었다. 실제로 에스파냐를 대표하여 신세계를 마주한 자들은 교황께서 땅을 하사하셨노라고 선언하면서 이런 성명서를 읽어내려 갔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는 너희들의 나라에 강력한 힘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요, 너희들에 맞선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 그리고 교회와 에스파냐 폐하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너희들의 복종을 이끌어낼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과 너희들의 아내 그리고 너희들의 자식을 취할 것이고, 이들을 노예로 삼아서 폐하가 명하시는 대로 그들을 팔고 처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너희들의 재산을 빼앗을 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재앙과 손해를 너희들에게 끼치리라."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피사로 일파는 결코 채워지지 않을 탐욕과 폭력, 약탈을 이것으로 정당화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한낱 약탈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도미니크회의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1483∼1546)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어떤 폭력을 저질렀는지를 폭로했다.

"이 악마들은 행복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는 400레그아 이상의 토지―위대하고 감탄할 만한 자치제, 40레그아의 긴 계곡, 즐거운 마을, 금이 풍부한 대촌락―를 황폐화시키고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이 가공할 비참한 운명을 피하여 동굴이나 땅속으로 도망간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위대한 다양한 민족들을 학살하고 섬멸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잔학무도한 갖가지 새로운 낯선 방법을 구사하여 이들 무구한 사람들을 400만에서 500만(추정)이나 도륙했다."

■제국주의는 살아 있다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이렇게 무력을 앞세워 폭력과 약탈, 착취를 저지른 에스파냐의 행태는 이후에도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일본, 나치 독일 그리고 미국 등으로 이어져 제국의 본성 또는 특성을 이루었다. 이들 제국은 경제와 기술, 군사력에서도 앞선 점은 있으나, 본질에서는 탐욕과 공격성, 인종주의 등에서 창출되었다. 탐욕과 공격성, 인종주의는 코렐리 바네트가 말한 "신념과 신화와 환상"과 어우러져 극대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제국이라 불릴 나라가 거의 사라진 지금에는 그러한 관념도 퇴색했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호리지성(好利之性), 즉 이익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고 본 법가 사상가들의 통찰은 여전히 타당하고, 그런 성향은 저 제국을 통해 극대화되었으며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보라.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군. 국제신문DB

2001년 9월의 테러 공격을 빌미로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켰다. 그러면서 백악관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토적 야심이 없고,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위해서 자유에 헌신한다."

미국이 19세기 이전의 제국들과는 분명히 다른 방법과 몸짓을 취하기는 했으나, 이라크 국민의 정서나 판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치하려 했다는 데서 결국 제국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냈다. 2003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야만적 폭군으로부터 이라크인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1917년 영국 제국을 위해 이라크를 정복한 스탠리 모드 장군이 바그다드 시민에게 자신의 부대가 "정복자나 적으로서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왔다고 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과연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조지프 슘페터(Joseph Shumpeter)는 '제국주의와 사회계급'에서 로마 제국에 대해 이렇게 썼다.

"로마는 세상 모든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이익이 위험에 처해 있거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우겼다. 로마의 이익이 아니라면 그 동맹의 이익이었다. 동맹이 없을 때는 동맹을 억지로 창조해냈다. 위협받고 있는 로마의 이익이 무엇인지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을 때는 로마의 명예가 모욕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로마는 언제나 사악한 이웃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모습과 어찌나 그렇게 흡사한지. 아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은 20세기 들어 미국이 되풀이해서 만들어낸,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로서 이미지에 현혹되어 있어 그 제국적 본성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미국의 원조를 받고 미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한 한국 국민은 더욱 이런 그런 이미지에 젖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천문학적인 비용(2008년 기준으로 대략 3조 달러)을 들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편안하고 이로운 데로 나아가고 위태롭고 해로운 데서 떠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 신하가 되어 힘을 다해서 공을 이루고 지혜를 다해서 충성을 보여주려는 자는 그 몸이 고달프고 집안은 가난하며 아비와 자식이 함께 해를 입고 있다. 반면에 남몰래 간사한 짓을 하며 군주의 이목을 가리고 뇌물을 써서 중신들을 섬기는 자는 그 몸이 존귀해지고 집안은 부유해지며 아비와 자식이 온갖 혜택을 입고 있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 때문에 편안하고 이로운 길을 버려두고 위태롭고 해로운 곳으로 나아가려 하겠는가?" ― '한비자' 중 '간겁시신'

간사한 자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버리지 못한 국가의 행태도 그 겉모습과 속내는 다르다.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식민지 아닌 식민지의 국민으로 살게 될지 모른다.

■한비자에서 새 제국을 구상하자

저 폭압적인 제국과 제국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전 세계적 차원의 문화, 상업, 투자, 이민의 그물망이 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특정한 국가나 국경에 한정되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힘들에 의해 또 다른 제국과 제국주의가 꿈틀대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제국을 말한다. 그렇다고 저 폭압적인 제국을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제국을 구상해야 한다. 인종이나 민족, 이념이나 빈부 따위로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로서 열린 제국이어야 한다. 착취와 수탈을 일삼거나 폭압을 저지르거나 불평등을 조장하는 제국이 아니라, 관용과 평등,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국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나 정부, 민족, 국가 따위에 대한 낡은 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특히 우리는 유가적 사유, 특히 성리학적 관념으로부터 대담한 일탈을 시도해야 한다. 이제껏 '한비자'를 거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한비자' 자체가 대안은 아니다. '한비자'는 대안을 모색하는 출발점이요 장대한 기획의 불씨일 뿐이다.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싣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