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로맨스의 구도와 재난의 구도를 겹쳐 놓고 있다. 서로 별개처럼 보이는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그래서 실과 끈을 아주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한다.
도쿄의 한 남고생과 시골 이츠모리의 여고생이 서로의 몸과 이름이 바뀌게 되면서 이츠모리에서 일어날 재앙('재앙'은 원래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을 가까스로 막게 된다.
원래 타키와 미츠하 이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아니 모르는 관계로 이어져 있었지만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한다. 여기서, 우리 또한 서로 실과 끈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월호의 아이들이 수장되었을 때 우리의 심장이 쥐어짜듯 아팠던 경험이나,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로 우리 또한 모르는 채로 서로 이어져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가 분명하다.
전혀 관련이 없던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고, 생활을 공유하면서 둘은 몸이 바뀌는 이유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 세계(시골마을)를 구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임무를 마친 그들은 서로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그대로지만, 무언가를 잃은 느낌을 껴안은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두 사람에게 있어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시간이 바로 재앙이 아니었을까.
'너의 이름은'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이 분명하다. 그런데 시골 이토모리의 재앙을 그리는 데 있어 멈칫거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일테면 도쿄가 미래와 희망의 도시로 제시되고, 문자와 전화 통화도 안 되는 이토모리를 재난으로 폭파시켜버리는 저 상상력은 '도쿄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지역(시골 '이토모리')의 노력은 도쿄에 살고 있는 타키가 주는 정보가 차단되면 어떤 일도 불가능할뿐더러 파국이나 재생에 이르게 되는 구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호쿠 대지진과 원전 문제는 결국 도쿄(혹은 다른 세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은 단순히 아름다운 세계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아름다움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재난에 대한 공포를 슬며시 불러들인다. 소중한 누군가의 이름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내재해 있어 간담을 서늘케 한다. 분명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김필남·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