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은퇴를 결정했다. 일을 계속하게 되면 심장이 견뎌내지 못할 거라는 의사 소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다니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평생 노동자로 성실히 살아온 그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져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복지란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권리와 혜택이 아니던가.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다니엘은 질병수당 심사에서 탈락한다. 심장만 빼고 모든 부분이 건강해 보인다는 이상한 논리 때문이다. 탈락에 항의를 해보지만 저 관료들은 매뉴얼에 적힌 말만 기계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다니엘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지지했던 이 세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니엘은 두 아이를 둔 싱글맘 케이티의 힘든 상황을 이해하고,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이웃에게는 충고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좋은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정부는 어디 있는가. 정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관료는 약속시간에 10분 늦은 싱글맘 케이티와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 모르는 노인 다니엘에게 원리 원칙만을 강조하며, 그들을 제재하고 관리해야 할 상품쯤으로 취급한다. 여기서, 끔찍한 건 다니엘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보았고, 들은 것처럼 아주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켄 로치 감독은 대처리즘을 한결같이 비판해 온 감독이다. 대처리즘이 주도한 시장의 무한경쟁('자유'라는 이름으로)이 어떻게 약자를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을 말살시키는지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똑똑히 지켜보게 했다. 그런데 그것을 비단 영국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의 대량 해고자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으며, 산업정책에 희생된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고 실업자다. 우리는 언제든 직장을 또는 인생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그 불안 때문에 동료를 경쟁자로 취급하거나,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며 계약을 갱신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싸워야만 하는가? 타인과 나의 삶을 돌보는 데 등한시하고 미래를 위해서만 살고 있는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다니엘이 겪은 부당함이 그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님을 추적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보다 이익의 극대화를 우선시 하는 정부와 무능한 관료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하니 우리는 다니엘이 겪은 일을 동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가 겪은 부당함에 '분노'해야 한다. 바로 우리 모두가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인지 모른다.
김필남·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