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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권의 문화현장] '이런 미친' 역사에서도 우리는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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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6-12-04 19:58:15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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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이연, 봉작은 하성군. 바로 선조(재위 1567~1608)다. 그는 나라의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선조가 왕일 때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무너졌다. 1592년(선조 25년) 그 틈을 비집고 일본이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선조는 도망쳤다. 한양의 백성은 궁궐을 불태웠고, 노비문서를 태웠다. 행정 시스템이 무너졌다. 그러자 백성이 무너졌다. 그 증거가 '조선왕조실록'에 숱하게 있다. 굶주린 백성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보고가 도처에서 올라온 것도 그런 현상이다.

피란 갔던 선조는 1593년 10월 1일(음력) 한양에 돌아온다. 이즈음 실록에는 식인 기록이 잇달아 오른다. "서울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으며 심지어 모자간이나 부부간에도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습니다."(1594년 4월 6일 사헌부 보고) "지방에는 도적이 성행하여 재물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을 살해하여 거리낌 없이 잡아먹습니다."(1594년 3월 3일 비변사 보고)

모자·부부가 잡아먹었다는 건 무너진 국가 시스템에 깔려 굶주림의 극한에 내몰린 백성의 내면까지 무너졌다는 뜻이다. 도적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먹었다는 건 이런 행태가 조직화됐다는 뜻이다. 1593년 5월부터 1594년 5월까지 실록에는 식인 관련 기록이 최소 8차례 나오는데 유언비어는 명백히 아니다. 식인을 언급하거나 보고한 주체는 비변사와 사헌부(국가기구), 유성룡 윤두수(최고위급 관료), 명나라 관리 고양겸(외교관), 선조(왕)다. 이들이 이런 논의를 했다는 건 백성이 얼마나 끔찍한 처지였는지 증명한다.(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2권 참조)

놀랍게도, 도망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취한 조처는 백성을 꾸짖는 것이었다. 선조는 1593년 10월 9일과 1594년 2월 14일 "난리 통에 수많은 백성이 죽었으므로 살아남은 백성은 반 이상 상복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서울에 들어오는 날 보니 도성에 사람은 가득 찼으나 상복 입은 사람은 없었다"며 백성을 꾸짖고 관리들에게 시정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미친!" 이 대목을 읽을 때 문득 터져 나온 말이다. 조선이 '유교 국가'이므로 그럴 법도 하다고 여길 사람도 있겠다. 천만의 말씀! 유학은 공자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내놓은 학문·신념·철학 체계다.

선조의 '지적질'은 유교를 악용해 백성을 때려잡고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나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유학과 아무 상관도 없다. 진짜 유교라면 백성을 안아주는 게 먼저다. 선조는 이순신만 죽이려 든 게 아니었다.

이랬던 선조도 염치는 있었던 걸까? 그는 1593년 8월 30일부터 1595년 3월 27일 사이에만 6차례 왕위를 세자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한다. 하야하겠다고 만천하에 밝혔다. 무너진 권위와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정치공학형 꼼수로 이를 보는 의견도 있겠는데 적어도 실록에 실린 선조의 언어는 꽤 절실하다. 하야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선조의 양위를 집요하게 막아선 세력이 있었다. 절대로 권력을 넘겨선 안 된다며 양위를 반대한 이들은 당시 기득권 정치세력이다. 기득권 정치세력은 선조의 양위를 막는 데 성공했고, 조선은 혁신에 실패한 채 불과 30년 뒤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비극의 구한말로 달려간다.

박근혜 대통령은 혼자 살겠다고 또 하야를 거부했다. 기득권 정치세력은 그 주위에 눌어붙을 기세다. 선조처럼 시스템을 무너뜨렸고,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른다는 점에서 선조보다 못한 대통령이 '이런 미친' 역사를 되풀이하겠다고 작정했다. 촛불이 몸을 떤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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