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민 밥상에도 매일 오르고
- 상처 치료 약재로도 쓰이고
- 제사상 제물, 액막이도 된 명태
- 흔해서 '천하게' 썼지만
- 몹시 귀하게 여긴 민족 생선
- 푸른 동해서 다시 노닐 날
- 머지 않았다니 참 다행이다
17~19세기 한반도에는 한랭한 기후가 계속돼 기근과 재해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명태가 많이 났던 함경도 지역에서는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피해가 더욱 컸다. 흉작에 쌀이 모자라자 조정에서는 함경도의 명태를 영남(嶺南)의 쌀과 바꾸어 기민(飢民)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영남의 미상(米商)들을 타일러 쌀을 싣고 와 덕원(德源) 함흥(咸興) 등지에 쌓인 명태를 헐값에 교환해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영남의 미상들이 많은 이문을 남기게 되어 이후로 더 많은 쌀이 함경도로 유입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대책이었다. 함경도에서 명태는 쌀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많이 어획되었고 경제적 가치도 충분하였다. 이로 인해 잇단 기근과 재해로 헐벗은 기민도 구제한 고마운 물고기였으니 명태는 '구황(救荒)물고기'라고 불러도 가히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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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2월 촬영한 부산 동구 초량동 남선창고와 그 일대 거리 모습.
국제신문 DB |
■명태, 전국에 유통되다
17세기 중반 이후 시작된 명태 유통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이 무렵 명태는 주산지인 함경도를 벗어나 전국 팔도(八道)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명태도 다른 물산과 마찬가지로 해로와 육로로 유통되었다. 원산에 집산한 명태는 배에 실려 해로로 동해안에 있는 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이들 지역을 거쳐 남서해안 전라도의 주요 도시로 유통됐다. 그리고 경기도와 평안도는 소나 말에 실려 육로로 수송됐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명태는) 모두 남쪽 원산으로 수송하는데 원산은 사방 상인의 도회지이다. 배에 실은 것은 동해를 거쳐, 말에 실은 것은 철령(鐵嶺)을 넘어 주야로 끊이지 않고 팔도에 퍼진다'라 한 것에서 이러한 사정을 읽을 수 있다.
명태 유통의 주요 시장은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쌀과 명태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곳이고, 인구도 많아서 커다란 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경상도의 포항과 창원, 그리고 전라도의 은진 강경 흥양 등지는 명태의 주요 시장이었다.
■초량 명태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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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어시장과 '북조선
명태어선'이 담긴 옛
엽서.부산박물관
제공 |
1900년(고종 37)에 초량(草梁) 객주 정치국(丁致國)이 함경도 객주들과 힘을 합쳐 초량에 명태고방(明太庫房)을 설립하였다. 명태고방은 말 그대로 명태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였다.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명태는 함경도에서 배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된 뒤 경부선으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이 때문에 함경도에서 수송된 명태를 일시 보관할 창고가 부산에 필요하였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1914년에 경원선이 개통되기까지 약 9년간 부산은 우리나라 명태 유통의 핵심지로 기능하였다. 명태고방은 이 기능을 수행할 핵심시설로서 부산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창고였다. 1910년(순종 4)에 북어창고(北魚倉庫)로 개칭하였고, 1920년에는 북선창고(北鮮倉庫)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1914년에 경원선이 개통된 이후 부산에 왔던 원산 객주 중 일부가 원산으로 되돌아가 창고를 세우고 이름을 북선창고라고 하자, 1926년에 남선창고(南鮮倉庫)로 다시 개칭하였다. 1937년까지는 초량 객주 공동 소유였으나 이후 이병진이라는 사람의 소유로 바뀌었다. 2008년 12월까지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393의 1번지에 창고 건물이 남아 있었다가 해체되었다. 명태는 부산 바다에서는 나지 않는 물고기였다. 하지만 한때나마 명태고방에 체류함으로써 부산을 명태 유통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었고 부산에 창고업이 발달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여 주기도 하였다.
■아낌없이 모두 내어주다
가죽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소처럼 명태 또한 그러하다. 명태는 제 살을 갈기갈기 찢어주는 것도 모자라 내장, 알, 눈알까지 아낌없이 모두 내어주는 물고기인 것이다.
요즘과 같이 저장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은 과거에는 함경도와 같은 추운 지역이 아니면 생물 명태살을 맛보기 어려웠다. 명태는 대부분 건조한 상태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함경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사람은 요즘 북어로 부르는 딱딱한 명태살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어는 명태를 할복해 알과 내장을 꺼낸 뒤 바닷물에 씻어 찬바람에 말린 것이다. 배를 딴 명태는 보통 20마리씩 묶어 '덕(㯖)'이라고 부르는 봉에 걸어 말리는데, 여기에서 명태 건조장을 이르는 덕장(㯖場)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명태 건조에는 기후 조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날이 따뜻하면 육질이 딱딱하고 단단해지는 반면 날이 춥고 풍설(風雪)이 많으면 살이 푸석푸석하고 노르스름한 색을 띠게 된다. 풍설에 모진 고초를 겪은 명태를 최상품으로 치는데, 이것이 요즘 우리가 잘 아는 황태이다.
명태알과 내장은 소금에 절여 젓갈을 만들어 저장·유통하였다. 명태알로 담근 명란젓은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어 만드는데, 1766년(영조 42)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펴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나 '의궤(儀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무렵에도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그 맛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명태 내장으로 만든 젓은 창난젓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물고기 내장으로 젓갈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540년경의 중국 문헌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동이(東夷)를 좇아서 산둥반도 끝의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어디에서인가 좋은 냄새가 나서 사람을 시켜 알아본 결과 어부들이 항아리 속에 생선 내장을 넣고 흙으로 덮어두었다가 향기가 오르면 먹는다는 사실을 .
알게 되었다고 한다. 창난젓도 이러한 우리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18세기는 명태가 많이 어획된 시기였던 만큼 우리 선조들은 명란젓과 마찬가지로 창난젓도 즐겨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하게 쓰면서도 귀하게 여긴
19세기가 되면 명태는 다양하게 조리되어 매일의 반찬으로 밥상에 올랐다. 약재(藥材)로도 쓰여 찢긴 상처를 아물게 하고 허한 기를 보충하며 피로도 풀어주었다. 제사상의 제물로 오르고 굿이나 고사에 액막이로도 기능하였다. 그런가 하면 각종 속담에도 자주 등장함으로써 우리와의 친근함을 과시한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이 천하게 쓰면서도 귀하게 여긴 물고기, 그것이 바로 명태였다.
홀연히 찾아왔을 때처럼 명태는 그렇게 또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명태가 다시 우리를 찾아올 날이 멀지만은 않아 보여 다행이다. 명태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그동안 기울여 온 수산 관련 기관들의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곧 새해가 시작된다. 새해에는 명태를 비롯해 떠나간 물고기들이 모두 돌아와 우리 바다에서 힘차게 뛰어놀 수 있기 바란다. 아울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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