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어·방언, 시의 영역으로 유입
- 의성어·의태어 반복과 나열
- 소리내어 읽을 때 시 맛 으뜸
서울, 성북동 삼각산 자락에 사찰 길상사가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법정스님이 창건하고 입적한 곳으로 알려진 절이지요. 길상사는 제3공화국 시절 요정으로 유명했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자야(본명 김영한)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불도량으로 만들어주기를 부탁했고, 그 뜻을 높게 산 법정스님이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하게 됩니다. 무려 1000억 원을 호가하던 대원각을 조건없이 시주하려는 김자야에게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며 아깝지도 않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고 합니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김자야가 말한 그, 그가 바로 시인 백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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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강의하는 모습. 1937년 영생고보 졸업앨범에 실린 것을 백석 연구가 송준씨가 공개했다. |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뜨겁게 사랑했으나 평생 맺어지지 못했던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연을 알고 읽으면 더 아름다운 연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일부입니다. 흰 눈과 흰 당나귀의 색채 이미지 속에 순결한 이상,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시인의 맑은 서정성이 담뿍 담겼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시인 백석은 고어와 방언을 시어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시 전반에 토속미를 담습니다. 그리고 의성어와 의태어, 반복과 나열의 구문을 통해 속도감 있는 운율을 획득합니다.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이녀'('여우난골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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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고보 재직 시절 문예반 학생들과 찍은 사진. 연합뉴스 |
소리내어 읽을 때의 시맛으로는 백석의 시가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가능하면 홀로인 곳에서 눈으로 먼저 읽고 입으로 다시 읽으며 귀로 들어 봅니다. 특유의 리듬감이 시를 읽고 듣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것입니다. 백석 시에는 일인칭 독백을 통해 자아성찰을 하는 서정시가 다수 있습니다. 시인의 차고 쓸쓸한 독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릴 때 독자는 각자의 흰 바람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흰 바람벽이 있어' 중)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
백석은 25세 때 유일한 시집 '사슴'(1936년 간행)을 내고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고향 정주에서 해방을 맞습니다. 간혹 백석을 월북 시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사상이나 체제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북에서 시인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오지로 삼수군 국영협동조합에서 농사 지으며 살았으며 번역을 하고 동시를 발표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1995년 84세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보도된 게 마지막입니다.
영원한 모던 보이, 백석은 이제 없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입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