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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원준의 부산탐식프로젝트 <46> 묵나물 재발견

햇빛과 바람이 묵힌 산나물, 들나물…새봄 오기 전 가장 맛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2-14 19:08:29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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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춧잎 무청 고구마줄기 가지
- 아주까리 고사리 무 호박…

- 산과 들의 남새·푸새들 모아
- 생으로 혹은 삶아 잘 말려두면
- 먹을 것 부족한 겨우내내 든든
- 물에 불려 들기름에 볶아내면
- 씹을수록 입맛 도는 들판의 맛

한때, 집안에서 나물 볶는 냄새를 가장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아홉 가지 묵나물을 한 상에 차려보았다. 왼쪽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래기(무청), 고구마줄기, 다래순, 토란대, 시금치, 취나물, 아주까리(피마자잎), 고사리. 가운데는 미역줄기.
나물 볶는 날은 당연히 잔칫날 같은 집안의 경조사가 있는 날. 사람이 북적이고, 갖은 음식이 상에 푸짐하게 오르며, 모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날이었다.

육고기가 부족했던 시절, 나물만큼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이 또 어디 있었으랴? 그만큼 나물은 우리 민족에게 흔하면서도 가장 편안한 음식이었다. 나물이 갖는 각각의 고소함과 특유의 향이 잔치의 시작을 알리고, 이웃의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며, 모두가 잔칫상 주위에 둘러앉아 한 끼의 음식을 나누도록 이끌었다.

잔칫상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공평하게 가난했고, 먹을 것은 언제나 부족했던 시절, 없이 살던 집안의 밥상 위에는 반찬으로 나물이 늘 빠지지 않았다. 집 주위 자투리땅이나, 산에서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새, 푸새를 한 줌씩 가져와 각각의 특징을 잘 살려 독특한 음식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특히, 겨울을 대비해 다양한 나물을 데치고 말려 두고두고 먹었는데, 이를 '묵나물'이라 했다. '묵나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철에 뜯어서 말려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먹는 나물'로 정의한다. 말린 나물' '묵은 나물'을 이르는 '묵나물'은 봄에 지천으로 자라는 나물을 뜯어서 잘 말려 두었다가, 찬거리가 각박해지는 시기가 되면 의지했다.


총동원된 묵나물에서 물씬 향기가

   
아주까리 잎으로 쌈을 싸 먹는 것도 묵나물을 즐기는 좋은 방법.
제철의 나물은 향긋하고 맛있지만, 저장성은 약하다. 제철 나물에 비해 철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던 '저장 음식'의 대표적인 음식이 '묵나물'이었다. 겨울에 부족한 비타민이나 미네랄 등의 영양소도 보충하고, 입맛 없는 겨우살이에 밥맛까지 살려주는 지혜로운 음식이기도 했다.

묵나물이라 해서 일반 나물에 비해 향이나 맛이 현저히 떨어지지가 않아, 나물이 그리워지는 이즈음이 가장 맛이 좋고 흡족한 시기이다. 부산에서도 다양하고 독특한 묵나물을 즐겨 먹었는데,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으니 다양한 겨울 해초 또한 나물로 해 먹었다.

다양한 '묵나물'을 맛보기 위해 궁리하다 묘안을 떠올렸다. 본가의 어머니께 묵나물 요리를 부탁하기로 했다. 수십 년 부산에 살면서 묵나물을 친숙하게 접하고 능숙하게 장만한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본가에 들어서니 구수하고 향기로운 나물 냄새가 진동한다.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묵나물의 면면을 살펴보니, 시래기(무청), 고구마줄기, 다래순, 고사리, 미역줄기, 토란대, 아주까리(피마자잎), 취나물, 시금치 등등이다. 어지간한 '묵나물'은 총동원된 것 같다. "너희 할머니께서 묵은 나물을 참 맛있게 만드셨지. 고춧잎 말린 것, 무말랭이, 가지말랭이, 시래기, 늙은 호박말랭이를 손으로 조물조물거리면 별의별 음식이 한 상 떡 하게 차려져 나왔지." 어머니 말씀이다.

"들기름으로 볶으면 향이 좋고, 고소하거든. 옛날이야 기름이라고 해봤자 참기름, 들기름인데 나물은 주로 들기름으로 볶아 먹었지. 묵나물은 향긋한 들깨 냄새가 좋았던 음식이라." 집안이 온통 들기름 냄새로 기껍다.

"봄과 여름의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나물들이라, 영양분을 잘 간직했지. 면역력을 높여주고, 산성화된 몸을 알칼리성으로 바꿔주며, 체내 독소를 해독하는 효과가 있다"고 곁에서 아버지가 한 말씀 거드신다.

"묵나물은 정월 대보름께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먹으면 가장 맛있지. 보름에는 나물 다섯 가지 또는 일곱 가지 정도를 해 먹는데, 큰잔치에는 아홉 가지, 열 한 가지 나물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단다." 나물은 홀수로 정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다.


각양각색 나물 맛의 향연

   
집에서 묵나물을 조리하는 모습. 묵나물은 어르신들에겐 무척 익숙한, 잊혀 가는 음식이다.
묵나물을 한 가지씩 맛본다. 시래기는 푸른 무청을 잘 말려 식감이 부드럽고 푸슬푸슬하다. 들기름을 잘 받아들여 향이 그윽하다. 고사리는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어 씹을수록 들판의 자연스러움이 가득하다. 다래순 또한 나무를 감아 도는 힘이 고스란히 남아 나물에 탄성이 물씬 느껴진다. 토란대도 적당한 식감이 편안하다.

아주까리 잎으로 밥을 싸 먹는다.

아주까리 잎을 넓게 펴서 밥을 한 술 얹고, 잘 익은 멸치육젓을 또한 푸짐하게 얹어 입에 넣는다. 아주까리의 쫄깃한 식감과 구수한 멸치젓국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흥겹게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조합이 있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을 담아 밥을 비빈다. 모든 계절의 맛과 성정이 밥그릇에 담겨 가득하다. 한 술 입에 넣으니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청명하고 흔쾌하다. 어떤 것은 푸릇푸릇하고 어떤 것은 쌉싸름하다. 달콤한 맛도 있고, 맵싸한 맛도 있다. 미역줄기나물은 바다의 물결을 닮아 입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인다.

또 한 술 떠먹어 본다. 참 구수하고 흔쾌하다. 다양한 식감의 잔치처럼 펼쳐진다. 꼬들꼬들하고, 부드럽고, 들큰하고, 짭짤하고…. 각각의 재료가 섞이고, 어울리면서 하나의 맛으로 합일된다. 마치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강강술래가 입 안에서 돌고 도는 느낌이다. 참으로 기꺼운 맛이다. 모든 묵나물이 이리저리 함께 섞여 다양한 맛을 내니, 모든 절기가 한데 모여 어우러진다. 다양한 절기가 한 해의 건강과 복록을 일으키고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묵나물은 사계절을 대표한다. 계절이 갖는 각각의 특징을 내세워, 다른 계절의 부족함은 채우고, 남는 것은 덜어주는 것이다.


묵나물의 풍미 즐기려면 지금이 제철

   
입춘이 지났다. 곧 봄이 오고 새로운 생명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묵나물은 봄이 오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다. 지금이 묵나물을 즐길 마지막 시기인 것이다. 겨울이 지나는 길목에서 끝까지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묵나물의 역할이다. 그래서 묵나물은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한 사람들의 염원이자 기원이 듬뿍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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