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불교학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국 불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교수의 대답은 단순명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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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에서 탁발하는 승려들. |
"중국불교는 돈이 너무 많습니다."
이유를 따로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진단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종교 일반의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옷 한 벌, 밥그릇 하나(一衣一鉢·일의일발) 외에 어떤 소유물도 없는 것이 수행자의 살림이다. 이 가난은 영원한 정신적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그래서 석가의 자손인 비구들은 걸식을 하였다. 거지였던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신분을 수시로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가난한 중(貧僧·빈승)이라 부르는 호칭법이 있었다. 진리와 하나로 만나는 길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가난을 배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은 수행자의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중국 명리학에서는 가난한 운명을 '스님의 운명(和尙命·화상명)'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가난은 재산이 없다는 뜻도 되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없는 것이 진짜 가난이다.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진짜 가난이다. 심지어 소유할 진리가 있다는 집착까지 내려놓아야 진정한 가난이 구현된다. 그래서 마음에 송곳을 꽂을 땅이 없다거나 송곳조차 없다거나 하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의 순도는 가난의 진정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자유의 실천은 소유의 차원이 완전히 무너지는 일과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옛날 백장회해의 회상에 그 스승인 마조도일이 된장을 세 단지 보낸 일이 있다. 모두가 영광으로 여길 일이었다. 백장이 대중에게 말한다. "진리와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현장을 한번 보여 봐라. 좋은 대답이 나오면 이 된장을 함께 먹도록 하겠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장독을 깨뜨려 버리겠다." 여기에 대중이 대답하지 못하자 스님은 사정없이 장독을 깨뜨려 버린다. 나중에 마조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백장의 근황을 묻는다. 백장이 말한다. "스님이 보내신 장독을 깨뜨린 후 30년 동안 된장 부족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마조가 맞장구친다. "부족함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이것이 소유의 차원을 벗어나 진정한 부자가 된 정신적 거장들의 자유로운 삶이다. 백장스님은 소유의 차원을 박살 내는 일이야말로 여래의 보물창고를 열어젖히는 길임을 보여주었다. 이 여래의 보물 창고에서는 만사만물이 있는 이대로 보물이 된다. 그 보물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새로 생기거나 숨겨져 있던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이것이 여래의 보물이다. 심지어 번뇌의 근원인 여덟 층의 의식이 그대로 보물이다. 나와 대상을 둘로 나누기를 멈추면 이 여덟 층의 의식은 네 가지 지혜가 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계정혜(불교수행의 기본 덕목) 삼학이 된다. 뿐이랴! 오온의 다섯 가지 어두움이 바로 여섯 가지 신통으로 전환된다. 가장 하찮은 것조차 이미 완전하여 더하거나 덜어낼 것 없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불교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진단은 간단명료하다. 수미일관하여 말하자면, "한국 불교는 돈이 너무 많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