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제자에게 법을 베푸는 월산(月山) 스님의 법문이 있다.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너 이놈아!'로 시작되는 이 법문에는 눈앞의 이런저런 일을 우선 처리한다는 핑계로 수행과 깨달음을 뒤로 미루던 제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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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은 그 과정과 도달처가 '지금 당장의 이것'으로 귀결된다. |
초미(焦眉)라는 한자어가 있다. 눈썹에 불붙은 것 같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무엇이 될까. 상황에 따라 시험 합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건강 회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공동체의 평화 유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월산 스님과 같은 선사들이 규정하는 초미의 관심사는 지금 당장 닦고, 지금 당장 깨닫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경허 스님은 이 일을 이렇게 노래했다.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한순간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닦고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인가. 참선은 그 과정과 도달처가 '지금 당장의 이것'으로 귀결된다. 진리라는 것이 지금 당장의 이것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무엇을 설정하고 그것을 잡으려 하면 오히려 멀어져 버리는 것이 이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잡으려 하기를 멈추는 순간, 일상의 가장 평범한 일들이 바로 진리의 얼굴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의 이것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호명된다. '뜰 앞의 잣나무' '삼 서 근' '마른 똥 막대기'가 그 현장에서 일어난 지금 당장의 이것이었고 진리의 이름이었다.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면 새벽별이 지금 당장의 이것이 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진정한 수행과 깨달음은 평범함으로 돌아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별한 경계는 오히려 장애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이런 얘기가 있다. 당나라 때 법융(法融) 선사라는 이가 깊은 선정에 들자 새들이 매일 꽃을 물어다 바치는 이적이 일어났다. 그가 머무는 산에는 자줏빛 서광이 감돌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시의 큰 스승이던 도신(道信) 선사가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베푼다. '이런저런 생각을 끊으라. 그러면 벗어날 중생계가 따로 없고, 추구할 진리가 따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법융 선사는 이 가르침으로 깨닫게 된다. 그러자 새들이 꽃을 물어다 바치는 이적이 사라졌다. 참선의 지향이 지금 당장의 이것과 하나로 만나 노니는 일에 있음을 역설하는 얘기이다.
사실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일은 참으로 유혹적이다. 무엇인가 기적 같은 일이 있어야 진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선은 하루 한 끼 먹는 일을 표방하는 대신 절식과 폭식 사이를 오가지 않고자 한다.
매일 세 번의 예불, 혹은 여섯 번의 예배를 내세우는 대신 오만함에 빠지지 않고자 한다. 초인적 수행을 자랑하는 대신 정신적 나태에 빠지지 않고자 한다. 참선은 시공간 너머 저쪽을 보는 대신 지금 당장의 이것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며 밝게 눈 떠 있고자 한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