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이 부친의 49재를 지낸 뒤 그간 고마웠던 분들께 감사의 선물로 우산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거기에 들어갈 문구에 대해 물어왔다. 감사의 인사말 앞에 ‘법보시’라는 말을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한국 불교에서는 설법이나 불경의 배포 등과 같이 불교의 지혜를 널리 베푸는 일을 ‘법보시’라 부른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우산과 같은 선물에 법보시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큰 잘못이 없어 보이는 이 대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영 불편하다. 왜 그런가? 모든 보시는 본질적으로 ‘법보시’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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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49재 초재 모습. 국제신문DB |
원래 재물을 내놓는 것도 보시이고(재보시), 진리에 눈 뜨도록 이끄는 것도 보시이고(법보시), 이웃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도 보시(무외보시)이다. 다만 모든 보시는 나를 내려놓고 남을 떠받드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니까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기부, 심각한 위기에 당하여 공포심으로 내놓는 헌납, 보답을 바라는 뇌물,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한 거래 등은 보시라 할 수 없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정신이 없기 때문이고, 타인에 대한 자비심과 공경심이 깃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법보시의 정신이 담겨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보시가 될 수도 있고, 선물이 될 수도 있고, 거래가 될 수도 있고, 뇌물이 될 수도 있다.
보시의 원형은 자기 몸을 통째로 던진 석가모니 전생의 보시이다. 전생의 석가모니는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구원하겠다는 큰 원을 발한 보살이었다. 그런 그에게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보살은 쫓기는 비둘기와 배고픈 매를 함께 구하기 위해 비둘기의 무게만큼 자기의 살을 베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몸의 살을 아무리 베어내도 비둘기만큼의 무게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보살은 저울 위로 자신의 몸을 통째로 던져 올린다. 그제야 비둘기와 평형을 이루어 보살은 생명 구원의 원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몸을 통째로 던지는 보시도 법보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는 몸을 통째로 던지는 보시를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거듭한다 해도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삶의 모든 현장이 부처의 현현임을 확인하라는 주제로 집중된다. 진정으로 이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몸을 통째로 던지는 저 영웅적 행위만 보시가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이 보시가 된다. 눈을 깜빡이면 눈보시가 되고, 웃음을 지으면 웃음보시가 되며, 입을 열면 말보시가 된다. 마음에 뜻을 지으면 마음보시가 되고, 자리를 내밀면 좌석보시가 되며, 방문을 열어 맞이하면 공간보시가 된다. 요컨대 무엇을 내놓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울타리를 허물고 모두와 함께인 자리에 노니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을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49재는 나와 나의 것을 내려놓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다. 그 성찰의 끝에 내놓은 것이 우산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법보시’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