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던 한 교수님이 정년을 앞당겨 조기 퇴직을 하였다. 구속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교수에게도 걱정과 구속이 많다. 학생들이 도전적이면서도 성실하게 공부하여 건실한 업체에 척척 취업하는 그런 상황이었으면 싶다. 잘 가르치고 좋은 글 많이 써서 뭔가 하나쯤은 그럴듯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교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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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에고치와 나방. 우리는 봄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 집을 짓듯 자신을 묶고 있다. |
미안하게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학생들은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교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누추해져 간다. 그래서 걱정과 구속에 얽매인 삶을 살며 자유와 초월을 갈망하게 된다. 지금 이것에서만 벗어나면 살 만할 듯한 것이다. 정년을 앞당겨 퇴직한 그 교수님의 마음이 이러하리라. 대부분 직장인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정말 그 교수님은 조기 퇴직으로 자유롭게 사실까?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름이 좋은 것들은 원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와 같은 법이다. 사실 모든 이름 좋은 것은 삶의 불만족스러움에 투덜대는 자기 마음의 투영체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만해는 군말하듯 말한다.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님일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자유가 님이고 행복이 님이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 그 행복이라는 것은 부자유와 불행을 탄식하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다. 불교의 스승들은 그림자에 속지 말고, 탄식하고 욕망하는 주체를 돌이켜보라고 거듭 가르친다. 모두 스스로 묶여 있다고 탄식하고 또 구속에서 풀려나고 싶다고 갈망한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묶고 누가 묶여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봄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 집을 짓듯 자신을 묶고 있다. 이 구속의 새끼줄은 분별적 이원사유에서 생산된다. 자유라는 좋은 이름을 세우는 순간 자동으로 부자유라는 좋지 않은 이름도 함께 세워진다. 그리고 거의 자동적으로 이 두 가닥의 새끼줄이 우리를 묶어 조여오는 것이다. 이것이 부자유와 구속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구속에서 풀려나는 길 또한 명백하다. 좋은 이름을 세우기를 멈추고 지금 당장의 이것과 전면적으로 만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옛날 혜명이 육조 스님에게 해탈의 길을 물었다. 그러자 육조 스님이 대답한다. “이런저런 인연에 끌리는 마음을 완전히 쉬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돌이켜보십시오.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 바로 이때, 무엇이 그대의 본모습이겠습니까?” 혜명은 이 말에 바로 깨달았다.
우리도 이렇게 물어 이렇게 눈뜰 수 있다. 다만 이름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을 멈추어야 한다. 좋고 나쁨을 세워 취사선택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분별을 멈춘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본래 완전하다. 보이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최고 아닌 것이 없다. 새는 모래밭에 서 있고, 이슬방울에 부추가 자란다. 진정한 자유는 살아 움직이는 눈으로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이것과 생생하게 만나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때 모든 이름 좋은 것은 회색이요, 진정 푸른 것은 지금 이것에서 확인되는 삶의 현장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