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불경을 읽으면 눈이 환해지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모든 것이 영 심심합니다.” 한 교수님이 말했다. 열심히 경전을 읽은 결과 깨달음 대신 심심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참 괜찮은 독서체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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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장 법사 일행의 모험을 다룬 중국 영화 ‘몽키킹 2’의 한 장면. THE 픽쳐스 제공 |
원래 불경 읽기는 부처의 깨달음을 만나는 효과적인 길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경전을 제대로 읽게 되면 반짝이는 지성 대신 평범함에 도달하게 된다. 왜일까? 불경 읽기는 여느 독서와 달리 분별적 앎을 내려놓는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알아야 할 진리와 아는 나가 성립하지 않는 자리로 옮겨가는 차원 전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경 읽기에도 등급이 있다.
독서를 통해 ‘나’가 강화되고 지키고자 하는 진리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급의 독서’이다. 불교적 차원에서 보자면 백해무익의 독서이다. 읽을수록 나와 나의 것을 최고로 생각하여 집착과 번뇌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견고했던 앎의 차원이 흔들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중급의 독서이다. 법계에 가득한 부처의 빛을 생각의 구름이 가리고 있다. 그 생각의 구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독서를 통해 순간순간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면 그것은 ‘상급의 독서’이다. 이 때 팔만대장경의 모든 구절들이 나와 나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전략들을 용서 없이 부수는 금강저가 된다.
가장 멋지기로는 ‘최상급의 독서’이다. 무엇이 최상급의 독서인가? 경전뿐만 아니라 모든 현장에서 부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최상급의 독서이다.
여기 서천 여행을 마친 삼장 일행의 이야기가 있다. 삼장 일행은 영취산의 부처님을 친견하고 훌륭한 경전들을 받아 돌아오게 된다. 그 때 한 천신의 장난으로 이 경전 보따리들이 바람에 흩어지게 된다. 사오정이 흩어진 경전을 수습하다가 우연히 책을 펼쳐보는데, 아뿔싸! 모든 경전이 글자가 하나도 없는 백지가 아닌가? 손오공이 아난·가섭을 원망한다. 그들이 뇌물을 받지 못해 글자 없는 경전을 내어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돌아가 이 일을 고발한다. 부처님이 웃으며 말한다. “글자가 없는 이 경전이 진짜 경전이건만 사바 세계의 백성들이 미혹하여 이것을 읽을 복이 없구나.”
그렇다. 불법은 글자에 구속됨이 없어 모든 현장을 설법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현상이 경전이고 그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최상급의 독서이다. 모든 행위에 항상 부처님이 함께 하고 있고, 이 부처님을 바로 확인하는 것이 최상급의 독서이다. 그렇다고 글자가 쓰인 경전을 폐기하지도 않는다. 책을 펴고, 책을 읽고, 책을 덮는 모든 일들조차 경전 읽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서뿐만 아니라 움직이고, 멈추고, 앉고, 눕는 모든 동작이 경전 읽기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도대체 비범하거나 성스러운 경전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관념의 때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지성은 불법의 차원에서 보면 영혼의 소화불량을 유발하는 불량식품이다. 독서를 통해 머리가 울리는 충격과 속이 시원해지는 해방감 대신 심심함을 얻었다면 그 심심함에 눈 뜨는 것, 그것이 바로 최상급의 독서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