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부지런 강박증’ 같은 것이 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성공과 행복이 절로 찾아올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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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고, 눕고, 일어서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부처인데 오직 좌선에 매달려 특별한 무엇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
불교 수행 현장에도 그런 경향이 있다. 나는 ‘부지런’을 싫어하는 한 도인 스님을 알고 있다. “거사님은 참선을 오래 했으니 이제 알 만합니까?” “아직 캄캄합니다. 앞으로 부지런히 하겠습니다.” 그 스님은 이 부지런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과연 그렇다. 지금 이 현장의 만사만물을 통해 부처가 드러나 있다. 이것을 두고 다른 무엇을 찾기 위해 부지런을 떨 일이 없는 것이다. 발 딛는 곳마다 부처님 손바닥이고,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부처님이 들어 올리는 연꽃이다. 제대로 하고 있다면 가섭존자가 그랬듯 가만히 미소 지을 일밖에 다른 일이 없다. 그럼에도 모두 눈앞의 부처를 버리고 어딘가에 특별한 깨달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려간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스님의 얘기가 있다. 이 스님이 젊어서 눈을 뜨고 보니 선방에서 부지런히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이 안 돼 보였다. 앉고, 눕고, 일어서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바로 부처인데 오직 좌선에 매달려 특별한 무엇을 찾아 달려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에게 물었다. “이렇게 해서 뭐가 되겠습니까?” “그럼, 어째? 하지 말까?”
이것 역시 과연 그렇다. 비록 좌선으로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자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마저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마음이 열리기를 기대한다면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깨달음의 역사에는 초인적인 각고의 노력을 찬탄하는 기록이 허다하게 전한다. 옛날 독봉(毒峰) 선사라는 이는 침상을 없애고 오직 걸상만 놓고 참선하다 여기에 앉아 졸게 되자 걸상을 치웠고, 걸으며 참선하다 벽에 기대 졸게 되자 벽이 없는 곳에서 참선하였다. 이뿐인가. 절벽에서 참선하면서 졸음을 물리친 수행자도 있었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잠을 물리친 선사도 있었다. 그야말로 오랜 세월 눕지 않고 참선에 매진한 수행자의 전설이 무수히 전하고 있다. 엉덩이가 짓물러 방석에 붙을 정도로 좌선에 매진하였다는 효봉 스님 얘기도 그 하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목숨 걸고 부지런히 하라는 건가, 아니면 게으름에 맡기라는 건가? 만약 누군가 이 상반되는 가르침을 듣고 어느 한 쪽에 쏠렸다면 그는 아직 불교적 실천에 서툰 사람이다. 불교는 부지런과 게으름의 어느 한 쪽에 쏠리는 대신 오직 이것을 바로 보고자 하는 간절함의 용광로에 온 존재를 던지는 길로 우리를 이끈다. 지금 이것에 눈뜨는 일이므로 어려울 일이 없다. 최고의 게으름이 미덕이 되는 까닭이다. 자아와 대상에 대한 분별을 내려놓는 일이 무엇인지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목숨을 건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목숨을 건 부지런함으로 들어가 천하태평의 게으름으로 나오는 일이라 할까, 불교의 수행에는 이런 원리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삶이라 해서 다를 게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말이 되지는 않겠지만, 결론은 이렇다. 지금 이 순간 최고로 부지런하면서 최고로 게을러 보자.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