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대신 ‘용서의 길’ 택한 사람들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마리나 칸타쿠지노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1만3800원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
| 입력 : 2018-02-23 19:13:02
| 본지 13면

- 영국 ‘용서 프로젝트’ 설립자
- 학대·폭력 등 상처 받은 46명
- 가해자 용서 이야기 한데 묶어
- 실제 사례 통해 인간본질 탐구

1973년 영국에서 메리언 파팅턴의 여동생 루시가 친구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됐다. 그리고 20년 후, 그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루시는 납치돼 재갈이 물린 채 성폭행당했고, 고문을 받다 살해된 후 사지가 잘렸다. 가해자는 웨스트 부부. 남편은 체포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내는 재판정에서 메리언과 마주쳤다.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을 겪은 메리 존슨(왼쪽)과 바로 그 가해자인 오쉬 이스라엘.

이 상황에서 ‘용서’를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똑같은 방법으로 갚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법이 대신 단죄해주기를, 그 악마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도록 조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피해자 유족의 기대 또는 정의가 아닌가. 물론 메리언도 그랬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살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해자가 분노에 차 욕을 퍼붓는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었을 때, 그녀의 빗나간 무지가 어디서 잉태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어린 시절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받고 더 커서는 납치돼 성폭행당한 후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황폐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런 것을 왜 피해자가 이해해야 하지, 라고 당신이 분노한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없다.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용서 프로젝트’의 설립자인 마리나 칸타쿠지노는 종교가 흔히 그렇듯, 용서를 마음 수행의 하나인 양 인내심으로 이겨내라고 강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밉다면 미워할 수밖에 없다. 대신 폭풍 같은 시기가 지난 뒤, 인간만이 지닌 ‘공감의 능력’을 가동해 가해자의 입장이 돼 보기를 권한다.


	살라마타 바드지-나이트. 세네갈에서 자랐고 다섯 살에 할례를 받았다.

그가 쓴 나는 너를 용서라기로 했다는 46명의 용서 이야기를 실었다. 학대, 폭력, 테러, 학살, 전쟁으로 상처받았지만 복수 대신 용서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회고를 들으며 독자는 큰 혼란에 빠진다. 겪어보지도 않고 ‘용서하라’고 늘어놓는 설교라면 신물이 나지만, 이렇게 끔찍한 경험을 한 이들이 어떻게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심지어 친밀한 관계까지 맺을 수 있었을까.


	영국인 메리언 파팅턴. 실종된 여동생이 성폭행·살해돼 시신으로 돌아왔다. 부키 제공

‘왜 사람들은 용서하는가’. 저자가 끝까지 명확하게 매듭짓지 않은 질문이며 독자가 스스로 구해야 하는 답이다. 인간이란 선악 어느 쪽으로 화할지 모르는 존재라는 데서 저자는 그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끔찍한 범죄를 똑같은 방법으로 응징함으로써 악이 파괴된다면 왜 용서처럼 번거로운 것을 하겠는가.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는 피해자의 마음은 결국 가해자와 꼭 닮은 괴물로 변한다. 그래서 악은 순환할 뿐 조금도 줄지 않는다. 테러리즘과 이른바 ‘반테러리즘’ 간의 끝없는 전쟁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