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과 극 성격지닌 ‘조르바’와 ‘나’
- 과거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
- 예술을 가해 도구로 삼은 ‘그들’
- 거짓 사과로 회피말고 뉘우치길
할 수만 있다면 지난 책 리뷰를 회수하고 싶은 심정이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 것도 아니고 노벨문학상을 기다리며 추행을 일삼은 시인의 책을 몇 개월 전에 소개함 셈이 되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아니 예술가의 탈을 쓰고 그랬을까 믿기지 않는 연극계 거물 연출가의 작품은 보기도 했고 친히 모셔서 강좌를 듣기도 했다. 동경했던 작가라는 사람이 순식간에 한낱 기능의 보유자이자 범죄자로, 작품에 담은 세계와 가치를 가면으로 쓰고 살아온 이율배반적 삶을 통해 작품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
|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이 원작소설을 영화화 한 ‘희랍인 조르바(1964)’. |
가끔 이 세계의 모순을 강하게 느낄 때마다 나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속의 ‘조르바’와 ‘나’라는 인물을 생각한다. 최근에 자주 이 두 인물이 소환되었는데, 그때마다 맞닥뜨린 세계의 모순이란 주로 잘못한 사람의 성의 없는 사과 장면과 겹친다. 나는 최근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정도로 오염된 예술 세계를 환기할 겸, 잘못 앞에서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수많은 그들에게 반성과 사과의 태도를 숙고해보라고 내가 아끼는 이 책을 다시 꺼내든다.
‘조르바’는 물레를 돌리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손가락을 잘랐을 정도로 행동파이자 마초적이기도 하면서 감정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지적인 탐구를 갈망하는 고지식한 샌님이라고 할 정도로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스스로가 고지식한 샌님에 가까운지라 기행으로 점철된 마초적인 조르바라는 인물도,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의 우정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 마초와 샌님의 동행과 우정은 내가 지니지 못한 자질과 매력을 동경하던 자신의 경험으로 추측하는 정도였다. 또 서로 다른 감각을 지녔다 하더라도 생을 탐험하고 탐구하는 선상에서는 동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두 인물의 후회와 반성의 감각을 겹쳐 읽어보면 이 우정의 성립이 꽤나 잘 이해가 된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몽땅 털어주었지요. 마을을 빠져나오자 나는 셔츠 앞을 헤쳐 애써 땋은 성 소피아 성당 장식을 떼어 내어 갈기갈기 찢어발기고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지요. 지금도 도망치고 있습니다.”
‘나’는 번데기에서 나오는 나비를 돕자고 입김을 불었던 것이 나비를 죽게 만든 것에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있다. ‘조르바’는 전쟁 중에 잠입한 시장에서 구걸하고 있는 아이들을 만난다. 그 아이들이 얼마 전 자기가 죽인 목사의 아이들임을 알게 되고, 가진 모든 것을 털어주고서는 조국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자비한 일을 저지르는 것에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으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중이다. 반성의 태도로 보자면 이 두 사람은 동류이자 자신의 잘못을 직시할 정도의 호연지기를 품은 사람들이다.
독자로서의 단순한 실망뿐 아니라 내가 치유의 힘을 지녔다고 믿어온 시를 비롯한 문학이며 예술을 오히려 가해의 도구로 삼은 것에 대한 원망을 담아서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무겁게 짓누르는 양심’의 무게를 잴 양심 따위 당신들 안에 애초에 없던 거냐고. 잠시 거짓 사과로 회피하고 말면 영영 그 잘못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 면죄부 따위 주어지는 거냐고. 예술은 그저 얕은 양심을 가리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냐고.
기획자·청년정책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