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혼돈에도 체코에 남은 작가
- 폐지 더미서 홀로 사는 주인공 통해
- 이념의 하수구에 처박힌 시대 그려
- 의도된 반복적 문장 쓸쓸함 더해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탸입니다. 수많은 폐지 속에서 건져낸 책들은 그에게 많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폐지 더미 속에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오로지 생각들로 채워진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그는 홀로 완전히 다른 세계,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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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저자 보후밀 흐라발. ⓒHana Hamplova,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
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소설을 쓰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후밀입니다.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던 동시대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소설을 씁니다. 전쟁의 혼돈 속에서 프로이센의 수많은 장서가 폐기되고 전쟁 후에는 나치즘과 히틀러가 압축되어 버려지는 극단의 정치 상황을 목도한 그는 소설 속 한탸의 1인칭 고백을 빌려 이념의 하수구에 처박힌 세계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한탸는 압축기의 후진 붉은 버튼을 누릅니다. 기억 속에는 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니와 첫사랑 만차, 선로를 변경하는 철도원이었던 외삼촌 그리고 그의 곁에 머물다 게슈타포에게 잡혀가 처형당한 어린 집시 여자가 있습니다. 한탸는 말합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작은 둥지 안에서 살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 그저 책이나 갉아 먹는 작디작은 생쥐들 같은 인간에게 하늘은 폐지 꾸러미의 작은 구멍 하나 허용하지 않습니다. 보후밀은 이 소설에서 라이트모티프(Leitmotiv) 기법을 사용합니다. 되풀이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한 장면을 상징화하며 주제를 강화시키는, 음악에서 시작된 기법입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첫 문장은 130여 쪽의 짧은 소설 속 각 장의 앞머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압축과 응집의 공간에 갇힌 한탸의 고독한 삶을 강조합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문장 또한 그렇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뒤틀린 시대를 치욕을 견디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 모습 위로 여러 번 겹쳐지는 이 문장은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로 이어지며 읽는 이에게 씁쓸함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체코는 공산화됩니다. 노후한 한탸의 압축기 대신 최신식 압축기와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압축기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활자는 잉크 얼룩에 불과하며 모든 책은 폐지일 뿐입니다. 한탸는 손을 떠난 낡은 압축기를 보며 삼십 년 넘게 이어온 러브 스토리의 끝을 예감합니다. 지하실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책 속의 아름다운 세계를 헤매던 기쁨은 사라지고 한탸는 술집을 전전하며 길을 떠돕니다. 책과 폐지가 쌓인 압축기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한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압축기의 전진 버튼을 누르고 그는 책 속으로 영원한 피신을 떠납니다.
한탸만큼이나 보후밀의 최후도 극적입니다. 그는 1997년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합니다. 끝내 책 속으로 떠나버린 한탸와 비둘기를 향해 손짓하는 보후밀의 모습이 마치 한 장면처럼 겹쳐집니다. 작가 스스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고 밝혔던 만큼 소설 속의 한탸와 작가, 보후밀은 닮아 있습니다. 둘에게 책은 시끄러운 고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으며 한탸는 그 속에, 보후밀은 그 밖에 있었습니다.
짧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 소설을 3월, 봄의 즐거운 소란 틈에서 거듭 읽어봐야겠습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