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책 읽어주는 여자] 혼란스러운 세계…책은 그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강이라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지음/이창실 옮김/문학동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3-02 19:06:30
  •  |   본지 14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전쟁의 혼돈에도 체코에 남은 작가
- 폐지 더미서 홀로 사는 주인공 통해
- 이념의 하수구에 처박힌 시대 그려
- 의도된 반복적 문장 쓸쓸함 더해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탸입니다. 수많은 폐지 속에서 건져낸 책들은 그에게 많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폐지 더미 속에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오로지 생각들로 채워진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그는 홀로 완전히 다른 세계,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저자 보후밀 흐라발. ⓒHana Hamplova,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소설을 쓰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후밀입니다.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던 동시대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소설을 씁니다. 전쟁의 혼돈 속에서 프로이센의 수많은 장서가 폐기되고 전쟁 후에는 나치즘과 히틀러가 압축되어 버려지는 극단의 정치 상황을 목도한 그는 소설 속 한탸의 1인칭 고백을 빌려 이념의 하수구에 처박힌 세계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한탸는 압축기의 후진 붉은 버튼을 누릅니다. 기억 속에는 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니와 첫사랑 만차, 선로를 변경하는 철도원이었던 외삼촌 그리고 그의 곁에 머물다 게슈타포에게 잡혀가 처형당한 어린 집시 여자가 있습니다. 한탸는 말합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작은 둥지 안에서 살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 그저 책이나 갉아 먹는 작디작은 생쥐들 같은 인간에게 하늘은 폐지 꾸러미의 작은 구멍 하나 허용하지 않습니다. 보후밀은 이 소설에서 라이트모티프(Leitmotiv) 기법을 사용합니다. 되풀이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한 장면을 상징화하며 주제를 강화시키는, 음악에서 시작된 기법입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첫 문장은 130여 쪽의 짧은 소설 속 각 장의 앞머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압축과 응집의 공간에 갇힌 한탸의 고독한 삶을 강조합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문장 또한 그렇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뒤틀린 시대를 치욕을 견디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 모습 위로 여러 번 겹쳐지는 이 문장은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로 이어지며 읽는 이에게 씁쓸함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체코는 공산화됩니다. 노후한 한탸의 압축기 대신 최신식 압축기와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압축기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활자는 잉크 얼룩에 불과하며 모든 책은 폐지일 뿐입니다. 한탸는 손을 떠난 낡은 압축기를 보며 삼십 년 넘게 이어온 러브 스토리의 끝을 예감합니다. 지하실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책 속의 아름다운 세계를 헤매던 기쁨은 사라지고 한탸는 술집을 전전하며 길을 떠돕니다. 책과 폐지가 쌓인 압축기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한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압축기의 전진 버튼을 누르고 그는 책 속으로 영원한 피신을 떠납니다.

   
한탸만큼이나 보후밀의 최후도 극적입니다. 그는 1997년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합니다. 끝내 책 속으로 떠나버린 한탸와 비둘기를 향해 손짓하는 보후밀의 모습이 마치 한 장면처럼 겹쳐집니다. 작가 스스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고 밝혔던 만큼 소설 속의 한탸와 작가, 보후밀은 닮아 있습니다. 둘에게 책은 시끄러운 고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으며 한탸는 그 속에, 보후밀은 그 밖에 있었습니다.

짧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 소설을 3월, 봄의 즐거운 소란 틈에서 거듭 읽어봐야겠습니다. 소설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금양 부활할까…AI 데이터센터 진출 임시주총서 가결
  2. 2[도청도설] 발가벗겨진 사우디
  3. 3연 300만 찾는 청사포, 대중교통 하루 8대 마을버스뿐
  4. 415년 발암 석면지붕 슬레이트 치웠는데 증가? 실태조사부터 부실
  5. 5[시민기자] ‘핑크 가을’ 내려앉은 대저생태공원
  6. 6잘 넣긴 하는데…욱하는 외인, 속 타는 구단
  7. 7공항공사, 김해서 5년간 2575억 벌고도 투자 451억뿐
  8. 8양산 사송신도시 거점 준공…수영장·도서관·건강센터 한곳에
  9. 9이번에는 진짜 가야할 때…‘부캉이’ 다시 바다로 보낸다
  10. 10[뭐라노] 금양 부활할까
  1. 1언론노조·국제 비대위 “대주주 엄벌” 청와대 간다
  2. 2與, 추미애 ‘재정 빨대’ 진화 안간힘인데 기름 부은 부승찬(종합)
  3. 3또 도마 오른 항만공사 통합…“소신없는 사장 책임” 질타
  4. 4[속보] 진영승 합참의장 “北 적반하장 용납 못해…추가 도발 감행시 단호하게 대응”
  5. 5"법령 검토해 결정하겠다"던 김지용 중수청장, 국무회의 참석
  6. 6[2026 국감 브리핑]조경태 “최고 시스템 갖춘 건기연이 가덕도신공항 부지 침하 연구해야”
  7. 7여도 야도 시중은행 연쇄 해킹 사태 집중 질타
  8. 8이 대통령, "생애 첫 연금 지원사업 신청한 사람만? 실질적 불평등"
  9. 9통일부. 北 대남확성기 재개 위협에 “문제 해결 노력에 호응” 촉구
  10. 10이 대통령 "관행·절차 얽매이지 말고 주택 공급 전격전 펼치길"
  1. 1금양 부활할까…AI 데이터센터 진출 임시주총서 가결
  2. 2[뭐라노] 금양 부활할까
  3. 3내년 주목할 세계 여행지 톱10에 부산… 국내 유일
  4. 4데이터센터로 돌파구…이차전지 공장 유치권 등은 과제
  5. 5부산 명물 삼진어묵, 상하이 입맛 잡는다
  6. 6부산 몸집 키우는 해양금융 생태계
  7. 7"원전 사업자 한수원, '안전 미준수' 과징금만 5년간 338억원"
  8. 8선원노련 김두영 위원장, ITF(국제운수노련) 집행위 선출
  9. 9“사업비 턱없이 부족”… BS한양, 가덕도신공항 컨소시엄 탈퇴 의사 밝혀
  10. 10[한 손 뉴스] 첨단 드론 투입해 야간 산불 진화하는 길 열렸다
  1. 1연 300만 찾는 청사포, 대중교통 하루 8대 마을버스뿐
  2. 215년 발암 석면지붕 슬레이트 치웠는데 증가? 실태조사부터 부실
  3. 3공항공사, 김해서 5년간 2575억 벌고도 투자 451억뿐
  4. 4양산 사송신도시 거점 준공…수영장·도서관·건강센터 한곳에
  5. 5이번에는 진짜 가야할 때…‘부캉이’ 다시 바다로 보낸다
  6. 6태종대 집와이어 안전 괜찮나…시험탑승 정상도착 40% 그쳐
  7. 7“미래대응기금 조성, 교부세 축소 안 돼”
  8. 8양산시, 종합장사시설 후보지 오룡마을 선정…2030년 말 준공 목표
  9. 9어린이집 앞 석면지붕 빼곡…소유주들 빈집 등 이유로 방치
  10. 10상습 음주운전 꼼짝마…후 불어야 시동 걸린다
  1. 1잘 넣긴 하는데…욱하는 외인, 속 타는 구단
  2. 2전설 수지 수산티 넘은 전설…안세영 47번째 우승 ‘세계新’(종합)
  3. 3KIA 내리 3승이냐, LG 반격 첫 승이냐
  4. 4국대 에이스 곽빈, 최동원상 받는다
  5. 53연승 KIA, LG 꺾고 23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
  6. 6김태형 유임이냐, 이동욱 전 NC 다이노스 감독·조성환 해설위원 등 새 얼굴이냐
  7. 7돈으로 우승은 못 샀다…MLB 월드시리즈 연봉 하위팀 반란
  8. 8‘통산 최다안타 3위’ 손아섭, 두산에서 방출…선수 생명 이어갈까
  9. 9배드민턴 '세계 최강' 안세영, 여자 단식 최다우승 기록세워
  10. 10부산시청 고은, 전국체전 金…女사격 비공인 세계신기록
우리은행
최진숙의 유네스코 세계 유적지 이야기
보리수가 휘감아 지킨 불두, 몰락왕조 영광의 기억
얼굴에 담긴 이야기
물극필반(物極必反)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일상 언어에서 찾은 삶의 방향 外
쉽게 따라 배우는 걷기명상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남인목-웃는 나무
강동윤-Pixelated Oasis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경비원 /박필상
자화상 /최은지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누적 180만 넘긴 ‘극장판 치이카와’ 2주 연속 정상…예매율도 1위
팬덤의 힘 ‘극장판 치이카와’ 1위로…암살자(들) 근소한 차 2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21일 (음 9월 11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20일 (음 9월 10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참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유배객 자암 김구의 눈에 비친 남해의 가을 바다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