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직을 앞둔 한 교수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의 제안을 무시하는 후배 교수의 무례한 태도에 대한 서운함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이 더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새삼스러운 확인에서 나온 반응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은퇴의 현장에서 우리는 더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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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다닌 직장을 은퇴한 뒤 스타트업 인턴으로 채용된 벤(로버트 드니로)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인턴’의 한 장면. |
그런데 은퇴 여부를 떠나 우리가 과연 그 자리의 주인공이었을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돈과 지위에 주인공의 자리를 내놓았던 적은 없는가? 남의 시선에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고 자청하여 꼭두각시가 된 적은 없는가? 이렇게 묻다 보면 갑자기 뒤통수가 후끈 달아오른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적 의심은 더 본질적이다. 주인공을 자처하는 그 ‘나’라는 것이 과연 진짜 주인일 수 있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자면 ‘나’를 고집하는 옹고집은 가짜 주인이다. ‘나’의 범위를 극도로 좁게 설정하여 그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을 내치고자 하는 순간, 그는 주인의 자격이 없다. 80세 노모를 냉방에 방치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 무슨 주인이겠는가?
이에 비해 문 밖의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하인들에게 관대하며, 가족에게 따뜻한 가짜 옹고집이 오히려 진짜이다. 그는 ‘나’라는 것이 짚으로 만들어진 인형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집할 일이 없다. 울타리를 높이 세워 안을 고집하고 밖을 배척할 일이 없다. 이때 공평하여 지혜로운 눈이 열린다. 그러므로 원님 앞에 열리는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재판에서 이 가짜 옹고집은 이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나’의 울타리를 세우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가짜 주인공이다. 진짜 주인공은 이 가짜 ‘나’의 울타리를 허물 때 나타난다. 울타리를 허문 자리에서 보면 온 세계 만사만물이 한결같이 진정한 ‘나’, 진정한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 이 모습으로 찾아온 인연이라는 손님이 진정한 주인공이다. 이렇게 찾아온 인연을 회개한 옹고집이 ‘학 대사’를 모시듯 최고 정성으로 모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주인공으로 되살아나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주인공이라 잘못 믿어온 가짜 ‘나’가 무너지는 자리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관계가 무너지고, 육체적 조건이 허물어지는 일조차 그러하다.
은퇴야말로 진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맞이하는 새로운 출발이 되어야 한다. 옛날 중국의 우아한 지식인들은 사회적 봉사와 헌신의 시기가 끝나면 진짜 자기를 맞대면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였다. 그것은 전에 없던 치열함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그 치열함은 철저한 내려놓음의 방식으로 실천된다.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사회적 활동 시기에는 몸이 깨지도록 열심이었던 사람, 그가 이제는 은퇴하여 우주 섭리의 바람에 스스로를 맡겨 풀잎처럼 춤춘다. 멋지다. 이렇게 자아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고 우주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일이 은퇴라면 말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