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성분을 분석하는 기계가 있다면 욕망이 전체의 절반쯤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삶은 욕망으로 일어나, 욕망으로 지속되며, 욕망을 남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욕망의 세계(欲界)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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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만 원작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묘사한 저팔계. |
그래서 우리 각자는 욕망의 화신, 저팔계이다. 저팔계는 먹었다 하면 부침개 100여 장에 밥 몇 솥은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모든 여자들과 다 결혼하고 싶고, 아홉 날 쇠스랑으로 재물을 끌어들여 산처럼 쌓고자 한다. 욕망의 부림을 받아 동분서주한다. 바람을 일으키고 안개를 뿌리며 평생을 살아간다. 별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이 저팔계를 없애버리면 좋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는 자기 속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없애고, 의젓하고 평화로우며 지혜로운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뿔싸! 그것조차 욕망이 아닌가?
손오공은 다른 방식으로 저팔계를 상대한다. 그는 저팔계의 소문을 듣고는 여섯에 넷을 더하는 장사를 하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6+4=10의 완전해지는 장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저팔계와 천지를 뒤흔드는 싸움을 시작한다. 저팔계는 손오공에게 쫓기다가 삼장의 구법여행 얘기를 듣고 흔쾌히 귀순한다. 손오공은 항복한 저팔계를 우악스럽게 다룬다. 그 팔을 뒤로 꺾어 새끼줄로 묶고, 귀를 힘껏 잡아 끌며 돌아온다. 잠시 순해졌다 해도 돼지는 돼지이므로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욕망을 대하는 불교의 방식이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없애버리는 대신 그 작용의 현장을 놓치지 않고자 한다. 원래 수행을 통해 깨달을 특별한 진리가 따로 있지 않다. 수행과 깨달음은 작용이 일어나는 지금의 이 현장을 마주하는 일을 본질로 한다. 우리 삶의 주성분이 욕망이므로 그것이 작용하는 현장을 알아차리는 일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손오공은 저팔계의 귀를 힘껏 잡는다. 여기에서 손오공은 태양(日)이다. 그의 붉은 눈, 황금눈동자를 그림으로 그리면 태양이 된다. 저팔계는 달(月)이다. 그가 달나라의 항아나 그 분신인 여성들과 함께 하여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오공이 저팔계의 귀를 잡으면 日(태양)+月(달)=明(밝음)의 계산식이 완성된다. 6+4=10이 되는 장사가 바로 이것이다. 손오공은 이후 저팔계가 나갈 때마다 작은 날벌레로 변해 그의 머리에 붙어 다니며 이 밝음의 계산식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 밝음의 계산식에 의해 저팔계의 욕망은 그대로 청정한 지혜로 전환된다. 스스로 밝음이 된다.
구법의 여행이 끝난 후 저팔계는 정단사자(淨壇使者)가 된다. 사자는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저팔계가 왜 남들은 다 부처가 되는데 자신은 심부름꾼이냐고 불평한다. 그러자 여래가 묻는다. 그 심부름이라는 것이 제단에 올린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일인데 그래도 싫다면 다른 자리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팔계는 삶의 제단에 인연으로 차려진 모든 음식을 깔끔하게 먹는다. 깔끔하게 먹는 일이란 무엇인가? 짜면 짠 줄 알고, 싱거우면 싱거운 줄 알며 불평없이 먹는 일이다. 삶의 식탁에 차려진 희로애락이라는 음식을 희로애락으로 알아차리며 불평 없이 먹는 일이다. 일상의 음식에서나, 삶의 식탁에서나 편식은 안 좋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