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어느 인문학 공동체의 강의 끝에 한 참가자가 물었다. “이렇게 듣고 보니 불교를 쉽게 이해하는 길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그렇게 요령부득의 말들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걸까요?” 불교사에도 이런 질문이 드물지 않다.
우리의 경우만 해도 ‘불교는 그것이 설해진 맥락만 알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다.
불교를 하나의 진리체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승법과 선종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들은 이해하는 주체로서 나와 이해되는 대상으로서 진리를 세워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는 주체가 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연한 논리적 이해에 도달한 ‘뛰어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논리적 이해는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과 무관하다. 심지어 그것은 견성을 가로막는 장애이기도 하다.
알고 이해하는 일과 지금 당장 부처의 마음으로 돌아가 부처로 사는 일은 서로 다른 지평에 서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부처의 마음과 만날 수 없다. 이해하는 주체인 나와 이해되는 대상인 법을 내려놓지 않는 한 갈수록 불법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아와 대상에 별도의 실체가 없다. 이것을 스스로 적용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불교의 실천이다. 이렇게 내려놓고 나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로지 공하다고 부정한 모든 것이 활발하게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가장 비근한 지금의 이것이 바로 법신의 드러남임을 확인하게 된다. 오직 하나의 법신만이 여여하여 이렇게 해도 법신이고, 저렇게 해도 법신임을 알아 안심하게 된다. 만사만물의 다양한 모양이 부처의 드러남이다. 그것은 마치 한 가족 남녀노소가 빚는 만두와 같다.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내용물을 갖는 만두이다.
이것을 밝게 아는 것이 견성이라는 공(功)이다. 만사만물이 동일한 내용물을 갖는 만두임을 알아 시비호오의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불이평등을 실천하는 덕(德)이다.
이렇게 견성과 불이평등의 실천이 둘이 아니므로 달마는 이것을 합해 공덕이라 불렀다. 이에 비해 양무제는 절을 짓고, 보시를 하고, 경전을 보급하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유위적 실천으로 불교국가를 건립하였다. 양무제는 자기 업적에 취해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 주인공이라 자부하였다. 달마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제는 ‘철학이 맞지 않는’ 그를 나라 밖으로 쫓아낸다.
양무제는 스스로 큰 불교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집착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불교적으로 뛰어나다는 아만과 증상만에 빠져 있었다. 불교를 실천한다면서 자아를 뚱뚱하게 살찌우는 일을 한 것이다. 많은 불법실천자가 양무제의 길을 걷는다. 스스로의 공덕을 기억하고, 스스로의 지식과 이해를 과시하면서 특별한 존재로 자처한다. 나를 내려놓고 진리가 있다는 관념을 내려놓는 것이 불교이다. 나아가 내려놓았다는 자아의식까지 내려놓는 것이 불교이다. 이해하는 주체와 대상을 세우고 있는 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천해도 불교의 밖을 맴돌 뿐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