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의미와 지역성 되찾아
- 글로컬축제로 발전시켜 가야
문화는 지역성이다. 인간의 성격이 살아가는 공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어 가듯이, 마찬가지로 문화 또한 그것이 생성되어온 지역의 공기와 떨어져서 단독으로 존재할 순 없다. 특히 영화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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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호반(충주호)에 차린 무대에서 제천국제영화제(JIMFF) 개막식이 열리고 있다. JIMFF는 영화제의 ‘장소성’을 잘 살렸다고 평가된다. JIMFF 홈페이지 |
영화제의 슬로건, 전 세계의 영화를 아우르며 작품을 선별하는 프로그래밍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화제에 고유의 색채, 정체성을 만드는 건 영화제가 기반하는 장소, 공간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영화제를 찾는 이들은 먼저 영화의 관객이지만 아울러 축제의 장이 마련된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만이 아니라 장소로서 지역을 경험하고 그곳의 공기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총체적인 문화적 체험인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전주국제영화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지역성이 영화제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특성화에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전주의 경우 영화의 거리 일대로 영화제 행사 공간을 집중해 행사 진행의 효율성을 꾀하는 한편, 영화제 행사와 홍보에 한옥마을과 같은 지역의 랜드마크, 객리단길과 같은 지역 신규 상권을 활용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협력 관계를 지속하며 성장하고 있다. 제천의 경우 청풍호반, 의림지 등 지역의 자연경관을 영화제의 장소로 고수하면서 교통의 불편함이란 악조건이 있음에도, 도리어 이를 감수하고 찾아갈 만한 특색 있는 영화제로서의 이미지를 다졌다.
영화제와 지역사회가 서로 가치를 교환하는 ‘상호교환 가능한 렌즈’(가타리 ‘세 개의 에콜로지’)를 찾는다는 점에서, 영화제는 단지 영화만이 아닌 지역 활성화, 즉 도시 재생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글로컬(Glocal)의 시대라고들 한다. 지구촌(Global)과 지역(Local)의 합성어인 이 말은 흔히 지역에서 출발해 세계로 진출하자는 의미로 쓰이곤 하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국제성의 토대를 얻기 위해선 동시에 지역성에 대한 고민과 배려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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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열린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때 남포동에서 열린 배우 성룡과 김희선의 야외무대 행사 장면. 국제신문 DB |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지역을 기반으로 출발해 세계적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한 글로컬의 훌륭한 선구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영화제의 풍경에서 부산이란 지역 특유의 색채는 차츰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BIFF가 센텀시티와 해운대 일대로 영화제의 장소, 동선을 몰아가는 데는 행사 진행의 효율성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감안할 수 있다. 그러나 BIFF는 ‘국제영화제’인 동시에 부산이란 ‘지역-장소’의 영화제이기도 하다. 지금의 영화제는 어쩌면 ‘국제성’의 스펙터클에 치중한 나머지, 영화제 존립의 기반이 되어준 ‘지역성’을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풍경이 기원을 은폐한다’는 기 드보르 유의 명제를 빌리자면, 갈수록 스펙터클해진 영화제의 물신화된 외관은 도리어 그것의 기원이 축제와 지역 사이의 관련성이라는 사실을 파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이다.
23년의 긴 역사를 통해 BIFF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서 규모가 성장하고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다져왔다. 그러나 정작 영화제의 출발점이자 고향이었던 원도심의 비중은 2011년 영화의전당(해운대구 센텀시티) 개관 이래 뚜렷하게 축소돼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영화제 장소의 다변화, 남포동-해운대 이원화 체제의 복구는 단지 영화제 본연의 장소라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는 데만 의의가 한정되지 않는다.
낡고 허름해진 원도심의 공간 또한 장소성을 품은 지역의 일부이자 문화적 콘텐츠임을 잊어선 안 된다. BIFF는 좀 더 넓고 풍부한 부산의 공간-이미지들을 끌어안고 포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역사회에 대한 영화제의 공공적 기여, 영화제 브랜드의 특성화 가치를 제고하는 차원에서라도 절실히 필요한 사안이다.
마블사의 영화 ‘블랙 팬서’(2017)에서 광안리 시퀀스가 보여주듯이 부산의 지리적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개항 이래 산업화의 흔적을 간직한 원도심의 고색창연한 근대적 공간부터 첨단을 달리는 센텀시티, 해운대 일대의 현란함이 한데 포개져 혼재하는 복합적 정체성의 도시이다.
적잖이 부담 되겠지만 부산의 지리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더 넓고 다변화한 동선을 기획할 수 있다면, 영화제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지역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도시의 양태를 바꾸는 총체적 기예가 될 것이라 상상해본다. 곧 다가올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이 점을 기대한다.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온 도시가 혼연일체가 되어 들뜨는 글로컬(Global + Local)의 축제로서.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