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년 전 대학 대자보서 첫 조우
- 슬프고 아름다운 서정시에 충격
- 민주화 열정에 힘 쏟았던 시인
- 뜨거웠던 언어의 온도는 낮추고
- 시를 읽는 자의 가슴온도는 높여
- 폭염으로 힘든 여름 지나니 가을
-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 꿈꾸자
여름은 모질었다. 가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다. 가을이란 걸 생각도 못 했다. 이번 여름은 그렇게 억세고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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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교정에 있는 고 양영진 열사의 추모비(오른쪽). 사진 왼쪽에 보이는 조형물은 고 장재완 열사의 추모비이다. |
그래도 남몰래 준비는 했다. 이 여름이 가고, 9월의 첫 칼럼(‘조봉권의 문화현장’)을 쓰게 된다면 그가 남긴 서정시로 글을 시작하겠다고. ‘그가 남긴 서정시’란 고 양영진 시인이 쓴 ‘어머니의 손톱’이다. 내가 처음 이 시를 만난 건 지금부터 29년 전인 1989년 교정에 붙은 ‘대자보’에서였다. 그가 다녔던 대학을 다닌 나는 이 시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문학도 세상도 몰랐던 대학 1학년이던 내게 대자보에 손글씨로 쓴‘어머니의 손톱’은 충격적이고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슴에 박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게 서정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교과서 속에 있던 소월과 만해와 윤동주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렇게 통째로 강렬하게 직접 서정시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89년은 언어가 뜨겁고 크던 시절이었다. 학내의 사방에서, 도처에서 “조국과 민중을 위해” “불타는 적개심으로” “조국의 철천지원수 미제국주의와” “악덕 자본가의 아가리에”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날아가서 꽂히자”는 노래와 시가 많이 들려왔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통일을 향한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을 때였으므로 이런 언어는 필요했고, 구실을 했다.
하지만 뜨겁고 큰 언어란 자칫 한 발 잘못 디디면 허무해지기도 쉬웠다. 부산대 국문학과에 다니던 86학번 청년 시인 양영진은 그런 때 ‘어머니의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깎아드렸다. 청년 양영진 자신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열정을 쏟은 학생운동가였고 ‘투사’였다. 그런데 그는 당시 학생운동의 대의를 공유하면서도, 광장의 확성기 대신 문학을 택했다. 그는 좋은 서정시를 씀으로써 뜨겁기만 했던 그 당시 언어의 온도를 낮추고, 대신 그 언어를 읽는 사람의 가슴 온도가 올라가게 했다. 이것은 문학과 예술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서정시 ‘어머니의 손톱’은 이렇다(오른쪽 전문).
양영진 시인의 ‘어머니의 손톱’이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 이 시를 읽으며, 기성세대가 된 나는 어딘지 ‘조금만 더 출렁대고 조금만 더 덩실대는 호흡의 여유’ 같은 게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공동체와 조국을 걱정하던 대학 3학년생이 당시 뜨겁던 언어의 분위기에 쉽게 올라타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 사람들의 둔감한 일상을 두들겨 깨우는, 놀랍도록 일상적이지 않은 서정시를 썼고, 이 시 한 편으로 당시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줬다는 점 앞에서, 고마울 따름이다.
청년 시인 양영진은 1988년 10월 10일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고 독재와 외세를 비판하며 자결했다. 부산대가 1987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결한 고 장재완 열사와 함께 양영진 열사에게 지난 8월 명예 졸업장을 수여(국제신문 지난달 26일 자 27면 보도 등)하면서 올해의 뜨거웠던 여름은 한결 뜻깊게 지나갔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온도와 싸우느라 힘겹고 바빴던 여름에 비하면, 서늘한 기운이 살갗에 닿는 가을은 문학과 인문에 빠져들고, 인문과 문학이 내 삶에 스며들도록 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문학과 인문의 본령은 새로운 감각과 인식으로 세계(작품)를 접하고, 화들짝 놀라고,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다. ‘어머니의 손톱’이 꿈꿨던 세상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