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는 지금 중간고사 중이다. 선생들은 정밀하게 고안된 질문을 제시하고, 학생들은 옳은 답을 내놓기 위해 책을 찾고 필기를 외운다. 그런데 정해진 답이 있는 이 약속대련은 학생을 지치게 하고 무력하게 한다. 자기 삶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모색에서 일어나는 절실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답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분명히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하는고 있는데도 개인적, 사회적 삶의 지평을 활짝 열어젖히는 통쾌한 일이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
| 정해진 답이 있는 ‘약속대련’은 학생을 지치고 무력하게 만든다. 국제신문DB |
좋은 선생은 학생들로 하여금 갈수록 힘이 붙어가는 질문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불교의 선사들은 선생 중의 선생이었다. 그들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키우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진리를 묻는 학생의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하고, 정답을 기다리는 학생에게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이 뜻밖의 가르침은 정답을 기대하던 학생의 질문이 서 있는 지평을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의 질문이 세워지고 선생은 기회를 보아 그것을 다시 허물어버린다. 정답을 가져오면 ‘아니다’는 대답으로 상대하여 그 알고 이해하는 차원을 지워버리기를 거듭한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육조혜능스님에게 물었다. “오조 홍인스님의 법은 누가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겠지.” “스님은 그 법을 얻었습니까?” “아니!”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르거든.”
질문자는 당황해한다. 육조스님이 누구인가. 전에 없던 깨달음 운동을 이끈 최고의 스승이 아니던가. 그 삶을 직접 목도한 입장에서 그는 분명히 깨달음을 얻은 진정한 스승이다. 그런 스승이 불법을 모른다면 누가 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좀처럼 답이 내려지지 않는 이 질문은 마지막 대폭발을 향해 커져간다.
사실 ‘나는 불법을 모른다’는 이 말이야말로 깨달음의 증거이다. 그것은 아는 주체가 사라졌다는 뜻이고, 앎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만약 석가모니라는 주체가 불법이라는 대상을 알았다고 하면 불법을 비방하는 말이 된다. 석가모니는 앎의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진리와 하나로 출렁거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석가는 불법을 몰랐다. 아는 일은 나와 대상을 나눌 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섭 역시 불법을 전수받지 못했다. 전수받는 주체와 전수받을 대상이 사라져 모든 것이 황금으로 빛나는 지금 당장의 이 현장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나 ‘차 한 잔’을 답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이 조주 스님에게 있어서 지금 당장의 이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답의 제시에 급급해하는 일은 불교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이 이해의 주체와 대상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이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별명도 없다. 뒤도 없고, 앞도 없다. 이것이 무엇인가?” 만약 이 질문을 받아 정답의 제시에 급급해하는 대신 질문과 하나 되어 그것을 눈덩이처럼 키워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동의대 교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