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 국제법 서적 번역 ‘만국공법’ 출간
- ‘영해’조항 등 해양 관련 법률 망라
- 프로이센 군함, 톈진항구 주변서
- 덴마크 선박 나포한 ‘대고구 사건’
- 일본 이로하마루호 침몰 사건 등
- 해양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활용
- 日 대만 침공·운요호 사건 협상 등
- 중화주의 질서인 ‘책봉조공체제’
- 뒤흔드는 매개체로 큰 영향 미쳐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설명할 때, 전통시대에서 근대 시기로 넘어오는 것을 흔히 ‘책봉조공 체제에서 만국공법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만국공법(萬國公法)은 좁은 의미에서 책 제목이고, 넓은 의미에서 국제법의 또 다른 명칭이다. 미국인 국제법 학자 헨리 휘튼(Henry Wheaton)이 쓰고,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 A. P. Martin, 중국명 丁韙良·정위랑)이 번역한 ‘만국공법’이란 책은 서양의 근대 질서를 상징하는 대표적 국제법 서적이었다. ‘만국공법’은 1864년 베이징 경사동문관에서 처음 300부가 인쇄됐는데 지방관의 수요에 크게 부족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이 책이 출판되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19세기 후반에 국제법을 보통 ‘공법’ 혹은‘만국공법’이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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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해사박물관의 소개 책자에 실린 청나라 선단의 모습. 조세현 제공 |
■‘만국공법’ 속 해양
‘만국공법’에는 해양 관련 조항이 풍부하다.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영해’조항이다. “대개 포탄이 미치는 데는 국권이 미친다. 무릇 이러한 곳은 그 나라 관할에 전부 속하고 다른 나라는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영해 조항뿐 아니라 해적에 대한 심판, 항해에서 예절, 연해지역을 관리하는 권리, 고기잡이에 관한 권리, 대양을 공유하는 문제, 해전에 관한 조항 등 근대 해양에 관련된 거의 모든 규정이 망라돼 있다.
당시 해양 관련 주요 법률을 충실히 담아 해양국제법 서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특히 해적이나 민간 선박의 포획면허장과 같은 내용은 근대 서양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선점과 정복 관련 항목은 제국주의 특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번역서는 동아시아인에게 해양 분쟁에 활용되면서 바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하게 했다.
■중국: 대고구(大沽口) 선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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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에서 간행된 만국공법 번역본. |
청조는 갓 번역을 마친 ‘만국공법’을 이용해 프로이센-덴마크 간 벌어진 대고구 선박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면서 국제법의 유용성에 주목했다. 대고구 선박사건이란 프로이센이 톈진 주변 항구에서 덴마크 선박을 억류한 사건이다. 1864년 초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 문제로 덴마크와 전쟁 중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봄 중국으로 발령받은 신임 프로이센 공사 레프스(G. von Rehfues)는 군함을 타고 톈진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고구에서 톈진으로 가는 도중 바다에 정박 중인 덴마크 선박 세 척을 발견하고 이들을 나포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청조는 프로이센과 외교 마찰을 빚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프로이센이 중립국 중국의 영해에 있던 덴마크 선박을 나포할 권리가 있는가 여부였다. 레프스는 자신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선박을 구류한 곳은 공해이지 중국 영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선박을 구류한 장소는 의심할 바 없는 중국 관할의 내양(內洋)으로 ‘만국공법’에서 규정한 폐해(閉海)에 해당했다. 결국 총리아문이 ‘만국공법’의 설을 암묵적으로 활용해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였다. 대고구선박사건은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이 해양분쟁 해결에 처음 이용된 사례이다.
■일본: 이로하마루(伊呂波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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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하마루 사건 당시 만국공법을 활용해 상황을 유리하게 풀어간 일본의 개혁 운동가 사카모토 료마. |
‘만국공법’이 출간된 다음 해 일본에도 전래되어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일본 역시 만국공법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주도한 해양분쟁인 이로하마루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4월 사카모토 료마는 오오즈번(大洲藩)에서 160t급 증기선 이로하마루호를 빌려 무기와 탄약을 싣고 나가사키에서 오사카로 향했다. 항해 도중 이로하마루는 해상에서 기슈번(紀州藩)의 887t급 증기선 아카미스마루(明光丸)호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해상충돌 예방규칙이 없는 상태에서 빌린 배가 침몰한 것이다.
쌍방은 이로하마루의 손실 배상을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별 진척이 없었다. 료마는 아카미스마루의 항해일지를 압수해 세부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과정에서 항해 시 갑판에 파수꾼을 배치해야 하는 것이 국제법규임에도 충돌할 때 아카미스마루에는 파수꾼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료마는 이를 만국공법 위반이라 주장해 기슈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결국 아카미스마루 측이 배상금 8만3000냥을 지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대만과 유구: 유구표류민사건
청의 책봉조공체제에서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난 것은 유구(오키나와)와의 종속관계였다. 그 계기는 대만에서 발생한 이른바 ‘유구표류민사건’(또는 대만사건)으로 유구어민의 조난사고에서 비롯됐다. 대만 원주민이 유구인 54명을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1874년 일본군은 해군을 동원해 대만을 침공하여 목단사(牧丹社)를 비롯한 원주민 부족을 공격하였다. 청과 일본이 베이징에서 담판할 때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만국공법상 대만은 무주(無主)의 땅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청조의 총리아문은 대만은 청의 속지라며 “청일수호조약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라고 반박하였다.
일본은 생번의 땅은 화외(化外)의 땅이며, 중국이 비록 대만을 중국 판도라 하지만 유효한 통치를 하지 못하므로 국제법상 무주지로 선점과 정복 원칙에 따라 출병해 점령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총리아문이 가진 제한된 만국공법 지식으로는 담판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지 못했다. 결국 양국은 청일 ‘북경전조’(1874년 10월 31일)를 맺으면서 일본의 유구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했다.
■조선: 운요(雲揚)호사건
1875년 조선에서 일어난 강화도 사건 역시 해양과 관련이 깊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중국으로 가는 해로를 측량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연해에 접근하다 조선 측과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청일 간 담판에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공사는 운요호는 단지 담수를 얻기 위해 접근했는데 조선 측이 발포했다고 항의하였다. 이홍장은 ‘만국공법’ 가운데 3해리 영해규정을 이용해 연해 10리의 땅은 본국 영토인데 일본이 불법 측량하자 발포한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이에 모리 공사는 중국과 일본은 만국공법을 원용할 수 있으나 조선은 아직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 이를 원용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맞받아쳤다. 조선처럼 공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는 공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반론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제문제로 비화해 청과 일본 간 종주국 담판으로 이어졌고 결국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앞의 사례처럼 만국공법 수용과 전파에 대고구선박사건이나 이로하마루사건과 같은 해양분쟁이 직접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구표류민사건이나 운요호사건에서 보여주듯 초기 동북아 국제분쟁은 해양문제와 깊이 맞물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전통적 책봉조공질서의 해체는 해양을 매개로 진행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인들이 ‘만국공법’을 받아들인 후, 적지 않은 사람은 순진하게 공법을 이상적인 국제법이나 국제질서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공법을 공리(公理)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국제법은 유럽공법이었지 진정한 의미의 만국공법은 아니어서 강자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조세현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