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현산 선생 30년간 쓴 글 엮어
- 대학·군대·전쟁·민주주의 …
- 다양한 소재의 짧은 산문 80편
-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 동시대 고민해볼 과제 던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연말이다. 잦은 회의와 실행으로 쟁여온 일상의 피로감은 야간에 드라마를 몰아보는 것으로도 해소되지 않고 연말까지 따라왔다. 그러나 이 피로의 한가운데는 몸이 아니라 충분히 숙고하고 정리하지 못한 채 떠밀려온 정서적인 빈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여름 전에 읽기 시작해 시간으로 치면 늦은 밤에 접어든 겨울의 초입에서야 덮었다. 많은 사람이 작가의 글에서 영감과 위로를 받고 있었고, 추천도 많이 받은 터라 읽기 시작했는데 짧은 산문 모음집에다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 담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글과 글 사이를 빠르게 넘어가기 힘들었다. 곱씹어보니 80편의 짧은 글 하나하나에 사소한 것에 대한 세심하고 따뜻한 시선에서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찰까지를 넘나들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책은 대학, 군대, 전쟁, 국가의 통제와 폭력, 민주주의, 도시재개발, 유행과 신자유주의, 예술의 자율성, 역사 인식, 시대와 윤리 등 주제의 폭이 넓다. 그리고 30여 년에 걸쳐 쓴 글을 묶어낸 책으로 유신 시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온갖 IT 상품의 테스트 현장이 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까지 시대의 폭도 넓다.
이런 소개를 보면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지겠지만 결론은 반대다. 폭넓은 주제와 시기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편 한 편의 글들은 어렵지 않고 금방 몰입해서 읽게 된다. 작가의 문체이자 태도의 미덕이다. 거대한 담론이나 추상성에서 출발하지 않고 일상적인 주변의 이야기와 때때로 엉뚱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동시대에서 고민해볼 화제와 관점을 녹여낸다.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자유와 공간이 사라진 대학의 문제와 대학을 거부하고 자퇴한 김예슬 씨의 이야기로 확장하며(‘김연아가 대학생이 되려면’) 유신시대의 금지곡이었던 송창식의 “왜 불러”에서 시작해 언론을 통제하고 환경 파괴에 앞장서는 정부에 경고하기도 한다.(‘금지곡’) 어릴 적 작가가 살던 동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장옥이 각시의 노래’도 압권이다. 남편 떠난 뒤 홀로 남은 장옥이 각시가 신세한탄 삼아 다소 외설적인 노래를 곧잘 불렀는데 이를 걱정하던 이장이 마을에서 제일 큰 어른을 찾아가 어쩌면 좋겠냐고 묻자 노인은 “나처럼 귀먹기 전에 그 좋은 노래 많이들 들어두라고 하게”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70대 노인들의 사랑을 담은 영화 ‘죽어도 좋아’에 대해 제한상영등급 결정을 내린 영상물 등급위원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마무리된다.
‘당신의 사소한 사정’에서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더 엿볼 수 있다. 전영주 시인의 글쓰기에 대한 책과 ‘당신이 잘 아는 것, 사소한 것, 당신의 실패와 변화에 대해 쓰라’는 내용을 소개하며 한 주부가 여성주의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자기 친정이 어떻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별하여 키웠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며 유연한 글쓰기의 힘과 그런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사람은 꼭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루로 보면 밤이라고 할 수 있는 겨울. 이성과 합리, 속도, 거대담론 속에 설 자리 별로 없던 스스로 일상을 돌아보고 보듬는 것으로 시작해 세계와 연결되고, 회복하기 좋은 시기다. 밤이 던지는 말에 귀 기울여보자.
생각하는 바다 대표·문화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