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최정완과 함께 뒷패 자처하며
- 궂은일 도맡아도 늘 활기찼던 그
-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황망할 뿐
- 딴따라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는
- 부산 문화계의 좋은 기획자였다
2011년 6월 5일 ‘최’가 갔다. 2018년 12월 10일 ‘강’이 갔다. ‘최강’이 갔다. 부산의 문화예술판에서 ‘뒷패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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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세상을 떠난 강희철 씨. 무대 뒤에서 궂은일을 하며 예술가들을 빛나게 만들었던 그가 가면서 ‘뒷패의 시대’가 끝났다.
강희철 페이스북 |
지난 10일 극단 자갈치 단원이자 부산 서면 바보주막 대표이며 문화기획자인 강희철 씨가 향년 57세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그가 ‘최강’ 가운데 ‘강’이다. ‘강’의 부고는 부산 문화예술계 많은 사람에게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겼다. 소식은 너무 급작스러웠고, 빈자리는 컸다. 1961년 경남 밀양 무안에서 태어난 강희철은 금성고와 부산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1987년 극단 자갈치에 초창기 단원으로 들어갔다. 극단 자갈치는 민족극 운동을 했다. 민족의 예술 양식을 잇고 다듬으면서, 민중의 삶과 바람을 담고, 민주화에 보탬이 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은 당시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로 부임한 채희완 민족미학연구소장을 만나면서 마당극 운동 등으로 미학적 지평을 넓혔다.
부산의 초창기 민족문화예술운동을 이끄는 일을 시작한 강희철은 현장에서 많은 일을 했다.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창립위원, 부산한살림 창립위원, 김해세계가야대축전 기획실장, 김해문화재단 정책학술팀장, 부산민주공원 학술기획, 민족미학연구소 상임이사·기획위원, 부마항쟁민족예술대동굿 기획, 민족통일대동장승굿 기획, 일본군위안부해원상생한마당 기획, 문화기획 노리캄 대표 등을 맡았다.
그 세월 내내 강희철은 문화예술판의 ‘뒷패’를 자임했다. 뒷패란 공연에 출연하는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더욱 빛나도록 ‘뒤에서’ 기획·준비·조정하고, 협찬받고, 설치하고, 치우고, 정리·결산하는 직책을 일컫는다. 노고는 많고 빛은 잘 안 난다. 강희철은 추진력이 탁월하고, 일이 시원시원하며, 작품을 사랑했다. 강희철과 함께 극단 자갈치에서 단원 생활을 시작한 황해순 전 부산문화재단 본부장은 “무엇보다 희철이는 좋은 문화기획자였다”고 말했다. 그가 서면에 바보주막을 열고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을 줄곧 만난 것 또한 뒷패로서 기울인 노력일 것이다. 지난 8월 페이스북에 그는 썼다.
“아무래도 나의 이번 생은 무대 뒤 꽃 핀 자리 뒤쪽 그 어디쯤에 자리한 듯하다.…그래도 무대 뒤로 삐꿈 돌아봐주는 꽃 한 떨기 있어 위안도 희망도 간직한다. 다음 생도 허락된다면 큰 나무가 되어 션한 그늘이라도 드리우고 싶네. 안타까븐 내 삶아.”
이 글의 첫 대목으로 돌아가자. ‘최강’ 가운데 앞서 떠난, 부산 문화판 전설의 뒷패가 또 한 명 있었으니 ‘최’에 해당하는 최정완이다. 최정완과 강희철의 삶은 겹친다. 1960년 경남 함양 안의에서 태어나 혜광고와 동아대 수학과를 나온 최정완도 1987년 극단 자갈치 단원으로 시작했다. 둘은 벗이었다. 현장 예술인을 지칭하는 말인 ‘딴따라’를 무척 좋아한 것도 공통점이다.
전통적이고 실질적인 의미에서 부산 문화운동판 ‘뒷패의 시대’는 두 사람의 퇴장과 함께 이제 저물었다. 2012년 나온 추모의 책 ‘뒷패 최정완 이야기-나는 없다’(조기종 엮음·도서출판 전망)에 강희철은 이렇게 썼다.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이렇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자, 딴따라 좋았제!” (164쪽)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